[이 아침에] 총선과 돌배나무 ‥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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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개개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 관련 속에서 모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틀이다.
정치가 개인들의 바깥에서 다양한 삶의 활동과 선택에 작용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만드는 틀이라면 도덕은 개인의 내면에서 욕망과 충동을 통어하고 조정하는 틀이다.
이 안팎의 테두리가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개인들은 저마다 일상의 평화와 안녕, 그리고 생존의 이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들이 언제나 이 테두리 안에서만 갇혀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 틀을 넘어서는 생존의 욕구와 필요에 따른 의견을 내고 행동을 한다.
개인들도 사사로운 이해 관계가 상충될 때 싸움이 일어난다.
사회의 이익집단 간에 갈등과 대립이 격렬해지면 분열과 투쟁이 일어나고 사회 내부의 불확정성과 위기가 커진다.
정치는 이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타협의 기율로 작동함으로써 사회 내부의 불확정성과 위기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게 정치의 소임이고 덕목이다.
조정과 타협의 기율이 작동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죽은 정치다.
근래 우리 정치는 사회의 불확정성과 위기를 해소하지 못한 채 격렬한 혼란에 싸여 표류해 왔다.
우리 정치는 반민주, 부패, 냉전수구, 패거리정치라는 중병을 앓았다.
거의 죽은 정치였던 셈이다.
이번 선거는 중병 정치, 죽은 정치를 회생시키기 위한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이제 17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막을 내렸다.
선거 결과를 보느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선거 결과로 표출된 그 절묘한 수치에 탄복한다.
선거 결과는 낡은 정치 행태를 심판하고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면서도 여야가 균형잡힌 세력이 되게 했다.
이 절묘한 수치 뒤에 숨은 민심의 놀라운 평형 감각에 거듭 탄복한다.
민심은 여당에 1백52석이라는 과반 의석을 밀어주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거대 야당에 톡톡히 설움을 당한 여당으로서 과반 의석을 얻은 것은 날개를 얻은 격이다.
대통령의 재신임과 탄핵문제를 정치적으로 풀고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제 여당은 정책 실패와 지지부진한 개혁을 두고 야당 핑계를 댈 수가 없다.
국정과 개혁 추진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질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민심은 야당인 한나라당에도 1백21석을 주었다.
이 수치는 민심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당리당략으로 추진한 탄핵소추와 차떼기 등의 부패 관행에 대한 심판과 거여 견제 심리의 접합점에서 나온 수치라고 읽었다.
한나라당은 수구적이며 당파 이익에만 집착하는 소아병적 태도를 버리고 당당하게 여당의 비판적 감시자와 정책 대결을 펼치는 대안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지역구와 정당 비례대표 투표에서 의석을 얻어 국회에 입성한 것도 우리 사회가 이념의 다양성을 껴안는 폭이 그만큼 유연해졌다는 하나의 물증이다.
민심은 민주당과 자민련에는 몰락에 가까운 의석을 줌으로써 소모적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하는 정당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민심은 천심이다.
정치권은 선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여당과 야당이 한 입으로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말하고 있으니 이것을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화합과 상생의 정치는 사사로운 이해 관계나 당리당략을 떠나 이번 선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이념, 세대, 지역,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을 치유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개표 방송을 시청하느라 밤을 새우고 새벽에 마당에 나서니 산에서 옮겨 심은 돌배나무에 하얀 꽃들이 다닥다닥 피어 있다.
새벽 이슬 머금은 애기손톱만한 돌배나무 꽃송이를 바라보니 갑자기 청신한 기운이 몸을 휘감고 의욕이 샘솟는다.
정치가 개개인이 감당해야할 삶의 모든 면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매일 아침 직장에 출근하고 밥먹고 잠자며 크고작은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물질적인 나날의 삶의 지평에서 해야 할 일들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
이것들마저 정치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모란이 힘차게 땅을 밀며 붉은 촉을 내밀 듯이, 돌배나무가 가지마다 흰꽃송이를 피우듯이 새로운 생산과 삶의 도모를 위해 신발끈을 질끈 다시 매고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