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4월 총선에선 집권 여당이 절반을 조금 넘는 의석을 확보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차떼기 정당이란 오명과 탄핵 역풍 속에서 침몰할 것 같던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상회하는 의외의 선전을 한 것 못지 않게 주목할 사건은 민노당이 드디어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집권 여당의 1백52석과 제1야당의 1백21석에 견주어 보면 민노당의 10석은 미미하고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도 없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배출한 민주당과 보수세력의 한 자락을 잡고 있던 자민련이 몰락한 가운데 40여년 만에 국회에 등원하게 되는 민노당의 부상은 한국 정치지형을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민노당이 국회라는 제도권 틀 속에 들어옴에 따라 장외투쟁으로 점철된 투쟁과 쟁취의 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모할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선정적이고 과격한 구호의 장외투쟁은 이제 토론과 타협의 장내 정치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민노당이 다른 정당을 토론과 타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극복하고 투쟁해야 하는 판갈이 대상으로 본다면 이는 민노당의 선명성을 부각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 역시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구태의연한 정치를 재생산하게 되고 결국 그들이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아마 민노당은 등원 첫날부터 청바지를 입고 선서하는 깜짝쇼를 연출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 자체가 뉴스거리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으면 다시 길거리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상징과 이미지의 확대 재생산에 도통한 한국의 미디어가 열광적인 호응을 할 것이기에. 이미 그들이 예고한 부유세,이라크 파병 철회뿐만 아니라 민노당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청년실업,비정규직 노동자,구조조정 등 노동문제,나아가 계층 갈등 양상을 빚고 있는 평준화 폐지와 서울대 폐지의 양극단을 오가는 교육개혁,북핵과 북한의 인권,북·미외교,한·일 FTA협상,WTO 쌀협상 등 굵직한 국제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우리와 그들을 극명하게 긋는 대립적 사고만으로는 풀 수 없다. 머리띠 두르고 목소리 높이는 방식만으로는 금방 밑천이 드러난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기존 정치세력은 그들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민노당이 내세우는 정강정책을 스스로 '진보'라고 한다면 그보다는 더 오른쪽에 있는 열린우리당은 덜 진보적이고 우리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한나라당은 퇴보적이란 말인가. 한국에서의 진보가 체제 비판적이고 소외계층을 우선에 두는 것이라면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를 쟁취하고 개방형 경제체제에서 지속적 성장을 구가해온 한국에서 이제 그 단어는 더 이상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제는 해법이다. 성장인가 아니면 분배인가라는 흑백논리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왼쪽에서 출발했든,오른쪽에서 출발했든 정책 경쟁 과정은 놀랄 만큼 가운데로의 수렴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보의 깃발을 내건 민노당은 아마 자신들의 색깔이 바래질까 두려워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바깥으로 나오기를 머뭇거리고 주저할지도 모른다. 토론하고 타협한다는 것은 내 주장도 타당하지만 상대방 주장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인내심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진보,개혁,보수,어느 깃발을 내걸든 민주주의적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틀 속에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서로의 발언권을 인정하고 상대를 설득하려 하고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합의를 모색하지만 일정 시간이 흘러도 합의가 없으면 표결하고 표결 결과에 소수파는 승복하고 다수파는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이제 물처럼 흘러야 할 때다. 민노당의 40여년 만의 국회 진출이 '화려한 외출'로 끝난다면 한국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byc@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