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던 작년 9월 중순.서울 조선호텔에 정장 차림의 신사 숙녀 2백여명이 들어섰다. 이들은 큰 방에 있는 여러 개의 라운드 테이블에 조용히 둘러앉았다. 밖의 따사로운 햇살과는 달리 이 방의 분위기는 그리 훈훈하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강사는 참석자들에게 모두 눈을 감으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혹시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인 L씨는 마침 그 순간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울려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손을 든 사람이 줄잡아 70∼80%에 이르는 것 아닌가.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기업체 경영자,그 중에서도 중소기업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날 모습은 중소기업인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쌍둥이칼 업체인 헨켈이나 구두업체 발리,이탈리아의 명품가구 업체들처럼 국제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일구겠다는 다짐이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기업인들은 실리콘밸리의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해 세계 최대 PC 업체를 키워낸 휴렛팩커드 창업자들이나 대학을 중퇴하고 세계적인 기업인이 된 빌 게이츠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땅의 중소기업인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루 하루가 고달플 따름이다. 어디 한 군데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내수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매출은 곤두박질치고 공장가동률은 꼬박 14개월째 70%를 밑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금난이 가중돼 부도 위기에 몰리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5년 전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CBO)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벤처·중소기업 중 만기가 닥쳤는 데도 갚을 돈이 없다고 두 손을 든 업체가 80%에 이른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부 모기업들은 여전히 협력업체의 납품가격을 깎고 대금은 더욱 늦게 주고 있다. 중소기업의 올 1?4분기 어음결제 비중이 43.7%에 달해 전년 동기보다 1.6%포인트 늘어난 것이나 판매대금 총 회수기일이 1백34.7일에 달해 3.6일 길어진 것이 이를 방증한다. 현금 주고 원자재를 사와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 지금 납품하면 대금은 국화 향기 가득한 9월에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총선 결과 나타난 의석 분포를 감안할 때 앞으로 생산현장에서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분배 강화 등의 요구가 더욱 강력히 표출될 전망이어서 이래저래 중소기업인들의 어깨는 무겁다. 물고기에게 물이 필수적이듯 기업에는 풍부한 인력과 자금 등 좋은 경영환경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인들의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중소기업인들도 줄을 잇고 있다. 구로공단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게 아니라 칭다오로 옮겨진 지 오래다. 이 같은 떼거리 해외투자는 말이 좋아 글로벌 경영이지,실상은 한국 탈출이다. 오죽하면 세계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국가인 북한으로라도 공장을 옮겨 가겠다며 개성공단 착공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소기업이 1천7백개를 넘고 있을까. 중소기업 경영환경 이대로는 안된다. 부품 소재를 만드는 중소기업은 산업의 뿌리다. 이들이 다시 뛰게 경영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대로 중소제조업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중견기업과 대기업,금융기관이 비슷한 운명을 맞을지 모른다.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