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東根 < 명지대 교수.경제학 > 총선 후 처음 열린 당정회의에서 정부는 성장 우선의 정책기조 고수 입장을 밝힌 반면 여당은 성장과 개혁의 조화,비정규직 등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해 미묘한 시각차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총선 직후 "정책기조가 좌회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선제적 선언을 왜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참여정부 출범후 1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겨우 가닥을 잡은 '경제살리기'가 '성장 대 분배'논쟁 재연으로 퇴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접을 수 없다. 이같은 논란은 이미 예견됐다. 이번 총선은 특이하게도 민노당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당도 '이념과 노선'을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역풍'을 일으킬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은 비켜가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정당이 표방하는 이념과 노선은 '과잉과 극단'의 순치를 위해서도 선거과정에서 이슈화돼야 했다. 정책대결이 선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경제파탄이 위험수위에 와 있음에도 경제현안이 선거 이슈화되지 않았다.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정당 지지도에 당연히 영향을 줄 법한 정강과 지난 1년간의 경제 성과지표가 변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념과 노선,현실인식,정책비전 모두가 실종된 선거였다. 국민의 절묘한 선택이 '황금분할'의 정치지형을 만들었다고 하는 데 무엇에 근거한 절묘한 선택인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소위 '탄핵심판론'과 '거여 견제론'의 황금분할이었다면 우리나라는 결코 2만달러 소득을 달성할 수 없다. 작년 우리 경제 성장률은 외환위기 와중이었던 1998년을 빼곤 최저인 3.1%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경제인의 지적대로 일본은 터널을 빠져나오고, 중국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데 아직도 '청년경제'여야 할 우리나라는 휘청거리고 있다. 올해가 고비다. 세계 주요 국가의 동반상승 물결에 합류하지 못하면 잃어버린 4년이 되기 쉽다. 일각에서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됐기 때문에 투자가 되살아나고 경제운영도 순조로울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낙관할 만한 요인은 없다. 민노당은 총선에서 부유세 신설,청년실업자 의무고용,비정규직 철폐 등 소외 계층의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원내 3당으로 급부상한 민노당은 '경제개혁'을 주장하는 열린우리당 일부와 연합해 이를 의제화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내수침체를 겪으면서 신용불량자와 비정규직 근로자의 분배요구가 진보적 에너지로 결집돼 확대 재생산될 경우 '경제 판갈이' 욕구는 한층 높아질 수 있다. 소위 '바꿔 바꿔'가 이뤄졌다고 치자.그러면 바꾼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따라서 문제는 해법이다. 시장에 대한 인위적 개입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면 시장의 판 자체가 깨지고 성장은 지체된다. 그러면 사회적 약자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된다. 대리운전 값이 싸지면서 택시기사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 올해 임단협은 비정규직,주 5일제 등 굵직한 현안이 많아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 노동계의 주도권을 겨냥한 양대 노총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노조의 경영참여도 이슈화될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춘투'는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실업문제도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기업활력 제고로 풀어야 한다. 고용의 양과 질은 노조도 규제도 아닌 '시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강할수록 실업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베커 교수는 '승자의 저주'로 은유한 바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갔다.'실사구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이념과 계급갈등,보혁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라,자신의 운명을 국가에 맡기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더이상 추락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dkcho@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