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중편 '할머니의 평화'로 제3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서성란씨(37)가 첫 소설집 '방에 관한 기억'을 펴냈다. 작품집에 실려있는 8편의 작품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외 계층의 삶을 감정을 배제한 절제된 언어로 차분하게 그렸다. 작가는 세상의 각박함과 메마름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표제작은 회사를 그만 둔 뒤 종교에 빠져 가족을 가난으로 내모는 무능력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가족을 비참한 고통 속에 빠뜨리면서도 여전히 권위를 내세워 자식들에게 또 한번 고통을 안긴다. 등단작인 '할머니의 평화'에서도 무능한 가장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한자리에 모이지만 융화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준다. 소설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인 '그녀'들은 임신중 불어난 몸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성,남편의 거짓된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표현하는 여성,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핍박받는 여성 등 다양한 사유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녀'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에 만연한 외모 지상주의와 뿌리 깊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글에는 페미니즘적 저항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리적 굴절이나 종교적 초월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담담히 응시할 뿐이다. 지독할 정도로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만든다. 그저 날카롭게 파헤칠 뿐이다. 문학평론가 황광수씨는 "서성란은 훼손과 박탈의 조건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끈질기게 탐색하면서 우리의 삶을 근원에서부터 성찰해 보게 한다"고 평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