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모델은 한국에 크게 도움이 안될 겁니다." 지난 4월30일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노총(UGT) 사무실에서 만난 안토니오 오르도니에스 홍보국장은 "비정규직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스페인 모델의 비법을 취재하러 왔다"는 기자의 질문에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龍)중 하나로 스페인의 교과서였던 한국이 거꾸로 스페인을 배우겠다니 아이러니컬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97년 사회적 합의 이후 2000년까지 4백만개의 일자리 계약이 이뤄져 '스페인의 일자리 기적'으로까지 불렸던게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이미 한계점에 이른 상황"이라며 기자의 학습 방문을 난처해 했다. 스페인은 80년대 외환위기 이후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고용기준을 대폭 완화,노동시장에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넘쳐날 정도였다. 이 때문에 87년 15%에 불과했던 비정규직 비율은 95년 35%로 치솟았고 실업률도 사상 최고치인 24%를 기록, 노동자의 불만이 극에 달했었다. 알폰소 프리에토 노동부 고용실태조사국 부국장은 "퇴직금이 필요없는 비정규직을 기업들이 앞다퉈 채용하면서 노동시장이 크게 왜곡됐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와 노사대표들은 지난 97년 일명 '사회적 합의'를 체결, 비정규직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프리에토 부국장은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기업의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심해 어쩔수 없이 노ㆍ사ㆍ정이 나서게 됐다"며 노ㆍ사ㆍ정 합의 배경을 설명했다. 스페인 경영자총연합(CEOE)의 후안 메넨데스 발데스 전문위원도 "비정규직은 노동시장 유연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인사관리나 직원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생산성도 떨어져 기업 경쟁력에 별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합의'는 기업이 정규직을 채용할 경우 퇴직금 부담을 30%까지 경감시켜 주고 처음 2년 동안에는 고용보험, 건강보험 등 사회보험료의 40~60%를 정부 재정에서 지원하는 것이 골자였다. 또 비정규직의 해고요건도 강화시켰다. 비정규직 문제 해소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데는 '스페인 경제 기적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로드리고 라토 당시 재무장관의 능력이 절대적이었다. 지난 96년부터 올 3월까지 무려 8년간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고용증대와 민영화 확대 등 개혁정책을 추진,고용안정에 크게 기여를 했다. 최근에는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로 선출돼 세계무대에까지 나서게 됐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도출된 비정규직 처방은 처음에는 적지 않은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0년까지 4년동안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됐고 이중 76%가 정규직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비정규직중 정규직으로 전환한 계약 건수도 2백50만건에 달했다. 실업률은 11%까지(지난해 말 기준) 떨어졌고 비정규직 비중도 30.7%로 내려섰다. IMF도 스페인의 노력을 성공한 모델로 평가하고 지난 3월 한국 정부에 이를 적극 참조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모델은 정부의 재정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사실상 폐기처분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적 합의 기한(2000년)이 끝난 2001년엔 급기야 정부는 정규직 채용에 대한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2년동안 정부 지원이 연장됐지만 전도는 불투명하다. 스페인 노총의 오르도니에스 홍보국장은 "정부가 재정지원 중단을 발표한 이후 비정규직 감소 추세가 둔화되고 있어 스페인 모델은 이제 그 의미가 사라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재정압박을 받고 있는 공기업 일자리에는 비정규직 채용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공기업의 비정규직 비중은 지난 96년 16.1%에서 지난해엔 22.7%로 6.6%포인트나 높아졌다. 이 나라 비정규직 보호제도는 사실 한국보다 훨씬 취약하다. 퇴직금만 하더라도 스페인의 비정규직은 '8일×근무연수'로 우리나라의 '30일×근무연수'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 스페인의 정규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정규직은 연령에 따라 '45일×근무연수' 또는 '33일×근무연수'의 퇴직금을 받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5배나 된다. 노동부의 프리에토 부국장은 "정규직은 해고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채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임금도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평균 37% 정도는 많다"고 말했다. 마드리드=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