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눈 먼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연인에게 변하지 않을 사랑을 고백했고, 그 여인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어머니 심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당장 집으로 달려간 그는 어머니의 심장을 빼앗아 연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너무 서두른 탓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어머니의 심장도 길가에 내동댕이 쳐졌다. 그러자 어머니의 붉은 심장이 말을 했다. "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아가페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위해 당신의 젊음과 열정, 붉은 심장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뽑아내 주며 자신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어머니들. 나의 어머니도 그런 분이시다. 누군가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처음 떠오르는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뜨거운 도시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머니는 붉은 심장처럼 뜨거운 도시락으로 내게 다가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입이 짧고 아침을 잘 거르는 말라깽이 큰 딸을 위해 1년내내 도시락을 학교까지 갖다 주셨다. 2교시나 3교시가 끝나갈 무렵이면 빠른 걸음으로도 삼십여분은 족히 걸리는 길을 보온 도시락을 들고 바쁘게 걸어오시던 어머니. 수업시간이 끝날 때쯤 어머니는 교실 뒷문을 열고 반친구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고 급하게 가시곤 했다. 다른 반으로 친구들을 보러 간 쉬는 시간이나 매점에 간 사이에 어머니가 도시락만 전해주고 간 날도 많았던 듯하다. 시작종이 울려 교실에 들어오면 까만 보온 도시락이 책상 위에서 어머니 대신 나를 기다리고 있곤 했다. 한창 클 나이였던 우리들은 점심시간까지 도시락을 그냥 놔두지 못했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도시락 뚜껑을 열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와 기름기가 찰지게 도는 밥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도시락을 들고 온 엄마에게 나는 고맙다고 말하기는커녕 어린 동생들한테 시달리느라 부스스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짜증을 낸 적이 많았다. 몇 해 전 가을 고향집에 내려갔었다. 오랜만에 한가롭게 어머니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도시락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어머니가 내 도시락을 싸기 위해 매번 새로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셨다는 것이다. 두런거리며 나직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늙어버린 옆모습을 보며,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루 끝으로 쳐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어머니와 함께 망연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추억삼아 꺼냈던 도시락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쟁 치르듯 숨가쁘게 바빴을 손길과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어머니의 커다란 사랑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식에게 따뜻한 밥을 한 숟갈이라도 더 먹여보려는 어머니가 도시락을 들고 걸어오시던 길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들을 하셨을까. 나는 그 때 도시락을 주고 돌아서던 어머니의 등 뒤에서 뜨거운 도시락에 담긴 말없는 사랑을 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고 철없던 딸이었다. 어머니는 그 후에도 내가 힘들고 휘청거릴 때마다 붉은 심장처럼 내 마음속에 환하게 켜져 나를 밝혀주곤 했다. 요즘 들리는 소식들이란 모두가 살기 힘들다는 어두운 이야기들뿐이다. 경기침체와 더불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숨소리들이 많지만, 그 한숨소리가 우리들을 키우면서 내뱉던 어머니의 고단함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심장까지 내주실 수 있는 든든한 어머니들이 지줏대처럼 서 계시다. 어머니의 사랑은 메마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외되고 결핍된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뜨거운 도시락 같은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오늘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며 그 뜨거운 도시락이 평생 흔들리지 않는 힘을 주었다고, 어디서도 그처럼 맛있는 점심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비단 '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지금도 자식 걱정과 살림 걱정으로 가슴 졸이는 이 땅의 '우리 어머니'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