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신도시를 설계하고 도르래의 원리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거중기'를 발명한 최고의 실학자. 개혁과 수구의 대립이 치열하던 조선 후기에 선진 과학문물과 인간중심 사상으로 경세제민의 뜻을 펼치다 간 다산 정약용(丁若鏞ㆍ1762~1836).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격랑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한 주인공이자 유배지에서도 나라 살림과 미래 경영에 골몰한 인물이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가 조선후기 인물사 탐구 3부작의 완결판으로 내놓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김영사). 이 책에서 다산과 그 형제들의 꿈은 현재진행형으로 되살아난다. 이 책은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 발목잡힌 조선후기 역사에서 경직된 사회를 거부하고 열린 사회를 지향한 선구자들'로 다산과 그의 형제들을 평가하고 있다. 주자학 유일사상과 노론 일당독재의 폐쇄체제에 맞서 신사회를 추구했던 정조와 다산 형제의 인간적인 드라마가 힘있게 펼쳐진다. 다산의 실학 이념과 과학기술 중시 정신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과제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왜ㆍ호란 뒤로 봉건체제의 모순이 봇물처럼 터지던 당시 사회 전반을 바꿀 개혁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 그는 태어났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특별히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노력형이었다. 성균관에 입학한 지 6년이 지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정조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정조는 남인 계열인 다산과 그의 형제들에게 든든한 후견인이었지만 정조 개혁의 총아인 정약용은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가시밭길을 걷는다. 억눌려 있던 노론 벽파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 왕후를 앞세워 남인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신유박해로 다산 집안은 참담하게 몰락했다. 이복 맏형인 약현이 갖은 고초를 겪었고 막내형 약종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해서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으며 친매형 이승훈도 처형됐다. 다산과 그의 형 약전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에 유배됐다. 그러나 두 형제는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산의 유배생활은 무려 18년. '목민심서'를 비롯 5백여권의 저술을 남긴 그는 자기 무덤에 쓸 묘지명을 생전에 써놨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헤아려 보니, 경신년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약전은 흑산도에서 어류생태 연구서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이덕일씨는 이들의 궤적을 되밟으며 "닫힌 시대, 증오의 시대가 한 인간과 집안, 그리고 사회에 얼마나 큰 불행인지를 다산과 그의 형제들은 잘 보여준다"면서 정약용의 입을 빌려 "너희 시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1권 2백80쪽, 2권 3백12쪽, 각권 1만2천9백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