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善意)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나치즘이든 스탈리니즘이든 국가가 저지른 악행은 대부분 선한 의지의 결과였던 경우가 많다. 개인의 이기주의(악:惡)가 시장을 통해 전체의 복지(善)를 달성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임금은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생산성의 결과라는 것을 인식할 때라야만 비로소 1개 기업이 아니라 수도 없는 기업이 시장을 놓고 다투는 근대 경제구조의 복잡성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업가의 선의와,정부의 선의와,노동자의 선의에 '어떤 기업'을 맡길 수는 있어도 '모든 기업',다시 말해 국가 경제를 맡길 수는 없게 된다.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비정규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참으로 선(善)한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자는 '좋은' 주장에 토를 달 수도 없다. 당연한 명제는 신념의 대상은 될지언정 토론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내달리면서 동쪽 해를 보자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정책은 동기의 선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선악을 따지는 것이며 목적이 아니라 방법을 다투는 분야다. 비정규직을 보호하면 과연 근로자의 삶이 개선될 것인가. 답은 불행히도 '아니다'이다. 이 잔인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잠든 주인의 얼굴을 괴롭히는 파리를 잡기 위해 둔중한 앞발을 내려치는 어리석은 곰의 선한 의지와 다를 것 없는 일을 너무도 당당하게 벌이게 된다. 지난 수년간의 통계는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외환위기 이후 8%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이 지금 3%대까지 줄어있는 것은 왜일까. 민주노총은 종종 비정규직 근로자가 52%까지 불어났다며 과도한 노동의 유연성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을 펴지만,비정규직 증가에는 3%대로 줄어든 실업의 감소가 1 대 1로 대응하고 있다. 실제로 건설 부동산,농림어업,도소매 판매,음식 숙박업 순으로 비정규직이 크게 불어나 있다. 가계부실을 초래한 과도한 내수경기 부양이 만들어놓은 좋은 결과(실업의 감소)와 나쁜 결과(비정규직 비율의 증가)의 양면 조합일 뿐이다. 흔히 정규직 근로자들이 대거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통계는 거대한 실업자군이 비정규 취업자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점을 간과하고 비정규직 대책을 세운다면 사상의 누각에 다를 바 없다. 물론 비정규직을 보호하기로 든다면 '어떤' 근로자는 분명 좋아진다. 환경미화원 등 정부 비정규직과 한국전력 등 공기업,그리고 지난 주말 모 TV가 그토록 목청을 돋웠던 현대중공업 등 대기업 비정규직은 혜택을 볼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나머지 비정규직은 '반드시' 더 나빠진다. 공공 부문과 대기업 근로자들의 정규직화를 지원하기 위해 더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더욱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하고,그것도 안될 경우에는 결국 실업자로 되돌아가야 한다. 누가 누구를 지원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구의 것을 빼앗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기업과 정부,공공부문 비정규직이라면 그나마 일자리라도 안정돼 있다. 식당 아주머니들과,건설현장의 잡부들과,뱃사람들과,장사도 시원찮은 옷가게 여종업원들과,언제나 한계선상에 서 있는 재하청 업체의 근로자들은 무엇으로 일자리나마 지킬 것인가를 이정우 위원장은 답해야 한다. 결국엔 세금을 올리고,공공요금을 올리고,민간 기업에 전가하고,하청업체에 전가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가 궁금하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