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게임전시회인 E3쇼 개막 첫날 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은 다소 황당한 일을 겪었다. 느지막하게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느닷없이 한 국내 게임업체 사장으로부터 '고해성사'를 들었던 것. "그동안 김 사장님을 많이 욕했습니다.한국에서 리니지로 돈을 좀 벌더니 미국 개발자를 영입하고 이름 없는 미국 개발사를 인수하는데 낭비했다고 비난했습니다.엔씨가 국내 개발사를 키울 생각은 않고 외국에서 딴짓만 한다는 거였죠. 그런데 제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김 사장과 전혀 친분이 없는 L사장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번 전시회에서 엔씨가 선보인 온라인게임 '길드워'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게임은 김 사장이 "엔씨를 먹여살릴 차기작"이라고 말해온 게임.전시회 기간에 시험판이 공개되자 북미지역에서 무려 20만명의 게이머가 몰려들었다. L사장은 "엔씨의 노하우를 잘 살려 개발한 세계 최고수준의 온라인게임"이라고 길드워를 극찬했다.일본 게임업체 스퀘어에닉스조차 엔씨의 게임 스타일을 벤치마킹할 정도로 엔씨가 온라인게임 리더란 사실을 확인했다고도 했다. L사장의 얘기를 듣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동안 엔씨는 국내에서 숱하게 비난과 의구심에 시달려왔다. 미국에 8백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쏟아붓고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우여곡절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L사장의 얘기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김 사장은 자리가 파한 뒤 "게임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엔씨는 이번 전시회에서 L사장의 칭찬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하지만 한국 온라인게임은 이제서야 출발점에 선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유수의 강적들이 온라인게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전시회에서 확인됐다. 온라인게임은 더이상 한국 업체들의 독무대가 아니란 점도 여실히 입증됐다. 한편으로는 우리 게임업체들이 세계적인 고수들을 물리치고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선두를 지킬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지금 '조그마한'성공에 만족할 때가 아니란 생각이 전시회가 끝난 뒤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박영태 IT부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