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주간(5월17~22일)이 시작되기 직전 주말인 지난 14일. 전인오 씨아이정보기술 사장(40)은 "내가 왜 제조업에 손을 댔나" 하는 회한 속에 회사 문을 나섰다. 그래도 한때 기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던 전 사장이 향한 곳은 서울 방배동 반포세무서. 폐업신고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세무서에 도착해 폐업신고서 양식을 받아 들었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서류를 작성할 수 없었다. 결국 폐업신고 절차를 동행한 한현태 이사에게 맡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난 97년 창업, LCD모니터 등을 생산해온 씨아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일시적인 자금부족 탓이었다. 전 사장은 2001년 50억원을 투입, 중국인용 휴대용단말기(PDA) 개발에 착수했다. PC와 모든 기능을 호환할 수 있는 PDA로 작은 '돈가방'을 들고 다니는 중국인들의 습관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제품이다. 중국 측의 반응도 예상대로 '띵호아'였다. 중방과기라는 회사에서 7천만달러어치의 주문이 들어왔다. 1차분 1천만달러어치를 2003년 5월말까지 보내기로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중국에서 '사스(SARS)'가 발생,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 '사스 쇼크'에 휘말린 현지 수입업체에서 납품을 3개월만 늦춰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것이 자금난의 발단이 됐다. 수출 대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운전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2억원 정도가 모자랐다. 자금지원기관을 찾아가 운전자금을 신청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PDA 개발에 돈을 쏟아붓느라 매출 증대에 신경 쓰지 않은게 실수였다. 금융기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년도보다 매출이 줄어든 기업에 대해선 웬만해서 돈을 빌려주지 않는 잘못된 금융 관행이 한 기업인을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전 사장은 그동안 신용을 쌓아둔 거래처에서부터 친인척에 이르기까지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지만 허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씨아이정보기술이 자금난에 허덕인다는 소문이 나돌자 그동안 네트워크 장비를 납품받은 기업들까지도 대금을 결제해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 사장이 받지 못한 납품 대금은 10억2천만원에 이른다. 지난 6개월간 돈 빌리러 뛰어다니는 사이에 공장은 멈춰섰다. 본사도 여의도 정우빌딩에서 서초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60여명에 달하던 본사 직원은 1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어음거래를 전혀 하지 않은 덕분에 부도는 면했지만 그가 살고 있는 경기 의왕 보라아파트는 빚쟁이들의 구두발자국으로 더럽혀진지 오래다. 그나마 아파트는 수원지법으로부터 가압류 통지를 받은 상태. 내달 초면 비워줘야 한다. 그는 물론이고 부인과 세자녀도 꼼짝없이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받는 월급도 압류당해 당장 먹고살 일을 걱정해야 한다. "한때는 자살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아직 한가닥 희망은 있습니다." 전 사장에게 남은 것은 개발해 놓는 PDA 특허와 중국납품권. "이 기술을 아주 헐값에라도 팔아 종업원들의 밀린 퇴직금을 정리하고, 돈이 남으면 다른 먹고 살 일을 찾아야겠지요." 하지만 제조업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건 정말 미친짓이란 생각이 들어요. 고용창출하며 제조업한다는 걸 알아주는 사회분위기가 아니잖아요." 회사가 위기에 몰려도 종업원은 물론, 심지어 가족까지도 모를 수밖에 없는 제조업체 사장의 고독을 한없이 절감하고 또 절망했다는 전 사장. 그의 지친 표정에는 이제 논물도 말라버린 듯했다. 이치구 전문기자 r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