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은 지금 '혁신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실제 기업에서 이뤄지고 있는 혁신 수준은 이에 전혀 못미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모니터그룹은 한국 기업이 빠져있는 혁신 딜레마의 근본적인 원인이 한국 기업이 채택하고 있는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우리 기업들이 이제까지 이룬 고속성장의 밑바탕이 된 이런 모방전략이 '혁신 리더(innovation leader)'로 발돋움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일본 전자업계의 지상목표는 세계 1위인 미국 IBM 따라잡기였다. 일본 기업들은 IBM의 제품개발 방향뿐 아니라 조직구조까지 본떴다. 앞선 기술과 제품을 좇는 이 '재빠른 추격자'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자업계는 5년 마다 2배씩 성장하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IBM의 전략을 추종한 일본 기업들은 컴퓨터 시장에 나타난 여러가지 중요한 기술발전을 간과했다. 예컨대 미국이 컴퓨터 운영체계를 도스(DOS)에서 윈도 방식으로 전환할 때 일본은 윈도 대신 NEC 방식인 DOS/V를 고집하는 우를 범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88∼92년 미국 전자산업은 연평균 8.5% 성장했지만 같은 기간 일본의 성장률은 미국의 4분의 1에 그쳤다. '재빠른 추격자'의 근본적 한계였다. 일본 전자산업의 이런 경험은 '재빠른 추격자' 전략을 놓지 않고 있는 한국 산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세계 유수 기업들을 모델로 삼아 '베껴오면서' 고속성장을 이뤄왔지만 5∼10년 뒤에도 그 전략이 먹힐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안주한다면 일본 전자업계가 그랬던 것처럼 '한방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우려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RCA 실바니아 레이디온 웨스팅하우스 등 1950년대 진공관 시장을 휩쓸던 기업들 가운데 지금까지 전자산업 리더로 남아있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 성공에 안주해 혁신을 등한시한 기업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냉혹한 시장의 외면뿐이다. 반면 정밀화학기업인 듀폰이나 3M은 끝없는 혁신으로 몇 백년 넘게 계속 성장, 발전해 왔다. 우리 기업들이 '재빠른 추격자' 전략을 고수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외견상' 더 이상 추격할 대상이 없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휴대폰 평면디스플레이 TV 자동차 철강 등 많은 산업 부문에서 글로벌 리더로 자리잡았다. 한국 산업계에 대한 이런 진단이 제기된 건 10년도 넘은 일이다. '국가 경쟁력'의 권위자로 모니터그룹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는 90년에 출간한 '국가의 경쟁우위'란 저서에서 "한국 산업계가 직면한 도전은 그동안의 투자주도단계(investment driven stage)에서 벗어나 혁신 주도(innovation driven) 단계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고 갈파했었다. 혁신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나 전략 수정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동안 경영진의 리더십 마인드와 전략 목표는 물론 조직구조, 업무프로세스, 조직문화, 성과지표까지도 재빠른 추격자 전략에 맞춰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여기다 그동안 이룬 작은 성공들이 전략 수정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재빠른 추격자로서 한국 기업들은 검증된 기술만을 갖고 검증된 시장만 겨냥하는 접근법을 사용했다. 선도기업이 도입하는 신제품이나 새 서비스에 민첩하게 대응해 수요가 많아지기 시작하면 해당 시장에 바로 진입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재빠른 추격자가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적잖이 누렸다. 시장에서 검증된 것을 생산했기 때문에 연구개발이나 마케팅 비용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초기 아이디어 개발 비용과 테스트 비용도 필요없었다. 문제는 이런 '2등 전략'이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혁신 리더가 되기 위한 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다른 회사 제품을 응용, 차별화된 제품을 신속하게 개발해내는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혁신적 제품을 개발해 상품화할 수 있는 연구개발 역량을 갖춰야 한다. 기술 및 전략 의사결정 시스템도 새롭게 통합할 필요가 있다. 여기다 경쟁업체의 정보를 확보하는데 주력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데도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함께 기존 제품을 모방하기 위한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에 치중하는 대신 신기술을 관리하고 고객의 수요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기술전략, 기획능력을 키우는데 집중해야 한다. 단기과제를 주로 다루며 위험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수동적인 기업문화도 장기적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고, 모호하고 불확실한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활기 넘치는 새 문화로 바꿔야 한다. 히텐드라 파텔 모니터그룹 IMI파트너는 "혁신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CEO부터 새로운 시장 창출이라는 목표를 경영의 중심축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대섭 기자 dssong@hankyung.com ------------------------------------------------------------------------- < Global Innovation Forum > 글로벌혁신포럼(GIF:Global Innovation Forum)은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4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특별기획입니다. 한경은 한국의 미래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성장을 이루는 혁신에 있다고 판단해 세계적인 전략컨설팅사인 모니터그룹과 공동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 현주소를 점검하고 선진국 진입을 위한 혁신 아젠다를 도출하기 위해 글로벌혁신포럼을 기획했습니다. 24일 행사에선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 대상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국 기업의 혁신 현주소와 도약과제'를 제시하고 오는 10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 아젠다를 발표하는 국민보고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