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편의 사랑시를 엮어 사랑이 우리 삶의 아름다운 권력이기를 꿈꾼다는 머리말과 함께 선집 제목을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로 낙점하고 최종 교정지를 던졌다. 막바로 모 단체가 주관하는 '이 달의 책' 선정 작업을 위해 한 무더기의 문학 신간들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작가 미상의 '나는 결혼했다 섹스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나카무라 신이치로의 '아름다운 여신과의 유희', 김형경의 '성에', 강석경의 '미불', 이응준의 '무정한 짐승의 연애',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한결같이 사랑과 성(性)의 발견을 통해 환상과 죽음과 예술을 다룬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소설들이다. 한데 그 틈틈이 영화를 본다는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한다는게 연애 얘기를, 드라마를 본다는게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열살 짜리 딸애의 얘기를 들어준다는게 자기들끼리의 삼각 관계를, 메일을 연다는게 음란스팸메일 중 하나를, 전시회를 본다는게 인사동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성문화박물관까지를 순례했다면? 세상이 온통 사랑과 성으로 '통'해 보이지 않겠는가? 사랑과 성을 둘러싼 이 깊은 현기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성과 섹스에 멀미나는 즈음이었다. '바람난 가족'이 아니라 '발정난 사회'를 부추기려고 작정이라도 한 걸까? 그간 우리 사회가 사랑을 성과 분리시켜 놓거나 성을 윤리와 도덕과 이데올로기의 덮개로 눌러놓았던 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성을, 섹스를, 육체를 지나치게 폄하했고 지나치게 억압했다. 숨 쉬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게 자연스러운 행위이듯, 정작 성 그 자체도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성(聖)스러운 대상도 아닐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랑과 성의 발견'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좀더 자연스럽게 개방하고 개발시켜야 할 것 같다. 사랑으로 하여금 빼앗겼던 성과 육체의 영토를 탈환하도록 해야 할 것도 같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의 우리는 성과 섹스의 해방을 위해 '운동'적으로 매진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러나 '아홉 살 인생'에서부터 '죽어도 좋아'까지 '바람난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외칠 때, 한 인생을 '나는 결혼했다 섹스했다 그리고 절망했다'고 요약해버릴 때, 모든 예술이 '연애의 무정함'과 그 '유희'와 평균 섹스 시간인 '11분'에만 집착할 때 허전한 건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불투명한 비전을 생각하면 씁쓸하기조차 하다. '불황일수록 섹시 코드로'라는 신문 기사 제목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김형경의 소설 '성에'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환상을 좇아 평생 무언가를 찾아 헤매거나 기다리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 각자가 꿈꾸었던 '세계일주'의 환상이나 '스위트'홈의 환상이나 '보물찾기'의 환상이 무너지고 그들의 관계가 성에의 집착과 그 소유로 치달아갈 때 그들은 서로의 육체를 낫과 도끼로 공격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과다출혈로 천천히 죽어간다. 어느 지점까지 사랑과 성은 그들 모두를 충만하게 하고 그들의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과 절망을 위무해주기도 했었건만…. 사랑과 성의 갑작스런 부상은 그 부분에 아직 미숙한 내게, 아니 우리들에게 현기증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성과 섹스에 무장해제 당한채 학대받는 포로로 전락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신경증이 되고 그것이 집단적일 때 병리학적 증상이 된다. 사랑과 성은 중요하다. 우리 생활의 소금과도 같은 그 사랑과 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더 솔직해지고 투명해지고 편안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 바람과 비례해 우리 사회 전체가 사랑과 성에 대한 과포장된 욕망과 도착적인 환상으로 병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사랑과 성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섹슈얼리티의 수위와 그 감각에 대한 모색도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성숙한 성문화 정착을 위한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