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해온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경제 변수'보다는 '정치 변수'를 더 챙기고 있다.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라크전쟁 등 국제정치 변수들이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면서, 그린스펀 의장은 경제관료보다는 정치관료들을 더 신경쓰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8일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시(1993~2000년) 연 3회에 불과했던 그린스펀 의장의 백악관 출입이 부시 행정부 들어서는 연평균 44회로 15배 가까이 늘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과거 그린스펀 의장은 재무부와의 정책 조율에 주로 신경을 썼지만 최근에는 국무부 국방부 등 다른 부처와의 회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 수시로 백악관 들락날락 =그린스펀 의장의 백악관 출입은 부시 정권이 들어선 뒤 급증했다. 딕 체니 부통령을 17회나 만났고, 곤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12회),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11회), 앤드루 카드 비서실장(6회), 콜린 파월 국무장관(1회),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2회) 등과도 자주 회동했다. 올 1분기 중에는 벌써 12차례나 백악관을 찾았을 정도다. 백악관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던 클린턴 시절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다. 반면 그린스펀 의장과 재무부 관료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줄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연평균 55.4회였던 회동 건수가 부시 정권 들어서는 45.3회로 축소됐다. 폴 폴커 FRB 의장 재임시 자문관을 지낸 마이클 브래드필드는 "최근 그린스펀의 행보는 독립성을 중시해 레이건 정부의 어떤 관료와도 만나려 하지 않았던 폴커 의장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말했다. WP는 "그린스펀 의장은 실제로는 사적모임 등을 통해 정부 관료들을 훨씬 더 자주 만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왜 만날까? =그린스펀이 관료들과 수시로 만나게 된 원인은 9ㆍ11 테러와 이라크전쟁 등 챙겨야할 지정학적 변수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사소한 폭탄테러가 세계 금융시장 움직임에 직격탄을 날릴 정도로 정치 변수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대규모 감세정책 등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정책의 배경에 대해 담당자들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길 원하고 있다.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과는 수십년간 친구로 지내면서 이들로부터 국제정세 정보를 얻는다고 WP는 설명했다. 하지만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다. 케네스 토머스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최근 그린스펀 의장은 '경제 바람'보다는 '정치 바람'을 더 타는 것 같다"며 "경제정책 수립에 국제정세가 중요해도 관료들을 지나치게 자주 만나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