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위기론이 경제위기 불렀나] 89년 경제실상 ‥ 헛다리 짚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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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의 경제난(難)은 대외여건 뿐만 아니라 국내 요인들마저 급격히 나빠지면서 나타났던 총체적 위기였다.
1985년 서방 7개국의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高)추세가 꺾이고 달러가 안정세를 되찾기 시작했는데도 한국은 민주화 투쟁과 노사분규에 휩쓸려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다.
원화 가치가 강세로 돌아서고 국제 금리와 유가도 오름세로 반전함에 따라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가져다준 3저(低)호재(저원화가치와 저유가 저금리)는 종료됐다.
여기에다 여소야대(與小野大)국회와 정치리더십의 부재로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은 끊임없는 의심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격화된 노사분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임금은 전산업에서 평균 21.2%(제조업은 25.1%)나 올라 1980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실질 임금상승률도 15.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88년 1백42억달러에서 89년 51억달러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반면 수입은 2백만호 주택건설 사업에 따른 건설투자 증가 등으로 크게 늘어났다.
높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생력화투자(자본재수입)마저 늘어 무역흑자(수출입차)는 88년 114억달러에서 89년 46억달러로 감소했다.
주가는 89년초 발표된 부동산투기 억제대책과 남북관계 호전 등을 재료로 4월1일 1007.7에 이르는 활황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물경기 부진과 금융실명제 실시 우려로 투자심리가 위축되면서 종합주가지수는 연말에 909.7로 끝났다.
끝을 모를 정도로 오를 것으로 믿었던 주가가 10%가량 하락하자 투자자들의 "증시부양"요구가 빗발쳤다.
결국 정부는 <>투신사의 무제한 주식 매입 <>위탁증거금의 대용증권 대납 허용 <>예탁금 이용료 인상 등을 골자로 한 "12.12 조치"를 내놓았다.
이규성 당시 재무부 장관은 12월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라도 투신사에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90년들어 금융실명제도 백지화됐다.
1989년 경제위기의 본질은 "대외부문 여건 악화와 고임금으로 인한 수출경쟁력 상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는 오히려 포퓰리즘적인 정책들,예를들어 증시부양과 건설투자 확대에 매달렸다.
중대한 실책이었다.
이승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1990년 11월 발간한 경제백서에서 1989년을 "기업의 투자의욕이 위축되고 경제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약화되고 부동산 투기 등으로 자금흐름이 왜곡돼 우리경제의 활력이 급속히 감퇴된 한 해"로 평가했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금융실명제를 둘러싼 논란이 위기를 증폭시켰다고 볼 근거는 약하다.
구조적 요인이 더욱 컸고 정부의 대증적 처방과 인기영합적 경제운영이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