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의류업체인 N사는 작년 12월 서울 잠실에 사옥을 신축하기 위해 건축허가까지 받았지만 최근 보류키로 했다. 인근의 4층 빌라에 사는 주민들이 일조권을 침해받는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 처음 소송이 제기될 때만 해도 현행 건축법에 규정된대로 건물설계를 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겠거니 생각했지만 법원은 일조권 침해를 인정해 이 회사에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 회사는 사옥 신축을 아예 포기할 것도 고려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구청에서 내준 건축허가만 믿고 공사를 추진하다가 낭패를 당했다"며 "건축허가 과정에서 미리 분쟁 요인을 걸러주는 장치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행정적으로 일조ㆍ조망권 분쟁을 예방하는 시스템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에 고층건물 공사만 시작되면 거의 대부분 일조ㆍ조망권을 둘러싼 소송이 벌어진다. 전문가들은 "행정 당국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제도를 손실하지 않고 분쟁을 전부 법원(사법부)에 떠넘기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 국내 건축법의 현주소 =국내에서 일조ㆍ조망 관련 법령은 건축법(53조)과 건축법 시행령(86조), 각 시ㆍ도의 조례 등에 근거하고 있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다세대주택은 제외)의 경우 인접 대지 경계선으로부터 아파트 높이의 4분의 1 만큼, 동간 거리는 건물 높이의 0.8배 이상 떨어져 짓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령 20층 규모(약 50m)의 아파트를 지을 경우 인접한 주택의 담에서 최소 12.5m 가량 떨어져 지어야 하며, 아파트 동간 거리 40m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같은 현행 건축법규정은 최근 들어 아파트 재건축사업 등을 통해 기존 주택지의 바로 인접한 곳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수십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를 비롯한 초고층 건축붐을 감안하지 않은 '구닥다리'다. 따라서 건축허가에 입각해 건물을 짓는 데도 하나같이 분쟁에 휘말리게 마련인 것이다. ◆ 개정안에도 문제점은 여전 =이같은 문제점을 뒤늦게 인식한 건교부는 최근 아파트 신축 때 인접 대지 경계선과의 거리를 건물 높이의 2분의 1 이상, 단지 내 동간 거리는 건물 높이의 1배 이상 띄우도록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대한주택협회 박상혁 부장은 "개정안대로 아파트를 지을 경우 아파트 층수를 줄일 수밖에 없어 아파트 한 동당 최고 30% 가량 가구수가 줄어들게 된다"며 "개정안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상지대 생산기술연구소 일조권분석팀의 이영규 교수는 "서울의 금싸라기땅을 최대한 활용, 수익을 맞추기 위해 건물 동간거리를 최대한 좁혀 짓는 현재의 건축관행 및 건축주의 마인드가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 한 제도만으로 일조·조망권 분쟁을 예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법률사무소 서우의 이승태 변호사는 "건물을 지을 때 건설자측이 주변 건물을 고려한 일조분석 보고서를 사전에 제출하도록 행정절차를 개선하는 방안이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