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로 대학교 강사생활 10년째다. 벌써 10년이라니.내 인내심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학기 수강인원이 3백명쯤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생들이 강의실 안에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강단은 또 왜 그렇게 높던지,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얼굴 근육이 실룩거릴 정도로 긴장했던 나는 출석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불러도불러도 끝이 없는 그 출석부를 부여잡고 졸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수강인원에 대해 누가 약간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차라도 밀리면 왕복 3시간 거리였다. 일주일에 2시간 강의하고 받은 강의료가 거마비까지 포함해서 한달에 채 20만원이 안 됐다. 그런 대우가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당시 나는 던져주는 대로 그저 덥석 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학교까지 오가는 데 투자한 시간이 결코 억울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때 나는 내 생애 첫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는데,고속도로를 오가는 동안 떠오른 수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에 사로잡혀 지루한 줄도 몰랐다. 두 번째 학기가 시작할 때쯤 그 작품으로 등단하게 됐으니 그것이 내 인생에서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드라이브 코스였던 것이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4년 전부터는 신촌에 있는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사인 내 처지는 변한 게 없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도대체 누가 강사 따위에게 관심이나 있단 말인가. 수강인원이 2백명이 넘으면 그건 이미 학생이 아니라 군중이다. 거기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강의료는 쥐꼬리 수준.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액수다. 내가 원고료 없이 강사료만 가지고 생활을 했다면 예전에 목을 매거나 무슨 사생결단을 냈을 것이다. 학교에 쏟아붓는 시간을 창작활동에 투자한다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강단에 서는 게 '전혀 보람 없는 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동안 미술사에 관련된 다양한 과목을 다루다보니 나름대로 쌓이는 것도 있고,학생들과의 교감을 통해 순수하고 싱싱한 에너지가 암암리에 지속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학기말이 되어 산처럼 쌓인 시험지를 채점하거나 리포트를 읽어야 할 때면 "이건 좀 심각하게 많군" 한숨을 푹푹 내쉴 수밖에 없다. 몇 년 전부터는 학기말 우울증이라는 걸 앓고 있다. 어제는 정말 우울했다. 학생들이 작성한 주관식 강의평가서 때문이다. 여기에서 좋은 이야기만 듣겠다면 아예 읽지 않는 게 좋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새겨들을 건 새겨듣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강사가 화를 낸다'라고 누군가 비아냥거리듯 쓴 문장은 정말이지 내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강의를 못한다는 식의 불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지만,아니 강사는 화도 못 낸다는 말인가. 학생들까지도 강사를 차별하는 마당에 "이제는 집어치우자"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솔직히 강사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자존심 상한다. 그런 강사 자리라도 목말라 하는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할지 모르겠지만 대학 강사는 결코 배부른 소리를 낼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다음 학기에 강의가 개설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하루살이 인생이라는 것,외국 비자 받을 때 강사라는 직위는 전혀 도움이 안 되며 우리 사회의 최하위 급료를 받으면서도 최저 생활보상자로 지정도 안 된다는 것,만약 총각 강사라면 장가를 가기도 힘들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려드리고 싶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지식인'의 현주소다. '교양과목 치고 너무 빡세다'는 내용을 적어 낸 학생들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다. 여기가 하버드나 예일이라면 공부가 '빡세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왔겠는가. 한국에서도 못 쫓아가는 공부는 밖에 나가서도 못 쫓아간다는 것.괜히 한국대학의 수준 운운 하면서 외국 나가 외화 낭비할 생각 말고 주어진 공부부터 제대로 하면 좀 어떨지.안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