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대 노동단체인 금속노조(IG메탈)는 올 2월 금속사용자연합과의 단체협상에서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항에 합의했다. 노조는 기업의 경쟁력 제고, 투자 확대, 경영 혁신 등에 적극 협력하고 기업 요구시 휴일 연말보너스 등을 반납할수 있는 권한을 근로자 대표에게 부여하며 전문인력을 중심으로 근로자의 50%까지(현행 18%)는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늘릴 수 있도록 한다는데 서명한 것. 지난해만 해도 독일 금속노조는 동독지역의 근로시간을 동독지역의 근로시간을 주당 38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폭스바겐 등 16개 사업장에서 무려 4주간 파업을 벌였었다. 변화의 계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이 파업이다. 총공세로 나선 당시 파업이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끝난 뒤 노조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근로시간 단축과 고용 보장, 임금 인상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목표로 여겨온 독일 금속노조가 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근로자의 고용 안정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지난해의 파업 실패는 독일 금속노조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독일 금속노조는 워낙 치밀한 전략을 세운 뒤에야 파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동안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피터 젠프트 독일 금속노조 베를린ㆍ브란덴부르크ㆍ작센주 지부장은 "파업 대상을 엄밀하게 선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파업 3∼5일이면 효과를 보는데 지난해에는 이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고 머쓱해 했다. 금속노조의 사용자측 협상 파트너인 독일 금속사용자연합의 폴커 프라이헤르 폰 반겐 하임 국제협력담당국장은 "금속노조가 사회적 파트너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며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비용 절감을 통한 근로자의 고용 보장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지난해와 같은 금속노조의 근로시간 단축 요구는 앞으로 없을 것으로 본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독일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은 우리에게 알려진 35시간 안팎보다는 훨씬 길다. 다임러크라이슬러사는 최근 4만명의 근로자중 개발ㆍ계획부서 전 근로자(1만여명)에 대해 주 40시간씩 근무시키기로 결정했다. 포르쉐사 역시 설비 확장(제4 생산라인)에 필요한 개발센터 인력 3천명에 대해선 주40시간 근로를 추진 중이다. 근로자 위주의 노동정책에도 일대 수술이 가해지고 있다. 세계 경제흐름에 맞춰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친노동자 정당인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지난해 유럽 최고를 자랑하는 자국의 사회복지체제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중장기 경제 회생 전략을 담고 있는 '아젠다 2010'이 대표적이다.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보장과 장기 실업자에 대한 수당 삭감, 의료보험 혜택 축소, 연금제도 개혁 등을 통해 '독일병'을 치료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노조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스피터 피텐 독일 경제노동부 노사정책국장은 "독일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세계경제전쟁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응하느냐를 놓고 고민 중"이라며 "우선 매년 막대한 예산을 지출하고 있는 각종 사회보험을 줄이는 데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 약화도 노조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세계경제환경이 급속히 변하는데 비해 운동노선은 아직도 근로시간 단축 등 예전 목표를 고수하는데 식상한 조합원들이 줄지어 노조를 탈퇴하고 있다. 금속노조 추산에 따르면 지난 3년간 20여만명이 탈퇴했다. 올해 금속노조가 근로시간 연장과 함께 기업의 경쟁력 향상과 혁신에 적극 협력키로 한 것도 이러한 조합원들의 정서를 반영한 결과다. 반겐 하임 국장은 "일률적인 근로시간 단축은 일자리 나누기 효과보다는 오히려 임금 인상 요인이 되고 있다"며 "이제 노조도 무엇이 기업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지를 깨달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독일노조는 지금 내부보다 외부로부터 변화의 필요성을 강요받고 있다. 특히 동구권 국가들의 가입으로 유럽연합(EU) 회원국이 25개국으로 늘어나면서 독일노조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반겐 하임 국장은 "이상에만 집착,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노조는 이제 유럽에서 버틸 수 없다"며 "노조가 회사 발전보다 제몫 찾기에만 열중한다면 저임금 국가인 체코, 폴란드로 공장을 옮길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베를린=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