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女兒修讀五車書 ‥ 형난옥 <현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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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k@hyeonamsa.com >
내게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修讀五車書)'라는 문장을 할아버지한테서 받던 그 날로 남(男)자를 비뚜름히 그어 버리고는 여(女)자로 바꿔 그 글자를 신주 단지 모시듯 하며 남아 못지않은 독서 경력을 가지려고 노력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여름휴가면 특히 왕년에 문학청년 아닌 사람 없었겠지만 문학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한 번 독서에 심취하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과일 몇 알로 끼니를 때우며 닥치는 대로 읽어댈 뿐만 아니라 주인공에 빠져서 자살을 꿈꾼 적도 있어 내 스스로 나를 다잡느라 무서워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밤늦게 자지 않고 소설을 읽는다고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피하느라 이불 속에 호롱불을 켜놓고 책을 읽다 머리를 그슬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나를 보던 선생님들은 어느 분 없이 "다독과 남독은 남는게 없다"고 정독을 권하셨는 데도 난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정독하는 책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세계문학에 빠져 스탕달, 발자크를 거의 십대에 다 읽었습니다.
20대 들어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을 읽고 한국문학에서 고전읽기 이후 처음으로 문학의 맛을 느꼈습니다.
소설을 읽으려고 복습할 시간을 아끼느라 걸어가며 그날 배운 수업 내용을 복습했는데 어른들이 곁으로 지나가도 못 보고 지나쳐 걱정을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노트정리나 재봉 숙제 같은 걸 못해서 벌 선 적도 더러 있었지만 순전히 게을러서가 아니고 독서에 빠져서 그랬습니다.
한때 학업의 꿈이 깨지고 실의에 빠져 생의 의욕을 잃어가던 때 산을 오르내리며 적은 용돈으로 인사동 헌책방을 뒤져 산 문고본들은 생각의 파수꾼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골라서 읽은 책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책들인 걸 보면 내가 안목이 있었던 건지 내 정신연령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힘들고 희망을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책 속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시대가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나도 모르게 무너지는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던 건 다독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여름입니다.
휴가 계획은 세우셨나요?
어딜 가도 경제가 어려워 큰 대책이 필요하다고 걱정입니다.
비싼 휴가는 엄두도 못 낸다는 올 여름휴가, 책을 읽으며 사고의 벽을 두텁게 한다면 이번 휴가는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값진 휴가가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