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先帝)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기 전에 붕어(崩御)하시고…로 시작되는 출사표(出師表)는 삼국지의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후주(後主)에게 올린 표문이다. 구절구절 선주(先主)에 대한 추모의 정과 후주(後主)에 대한 충성이 배어 있어 일찍이 소동파(蘇東坡)가 서경(書經)의 이훈(伊訓), 열명(說命)의 두 편과 견주었으며 그 글을 읽고 울지 않은 사람은 충신(忠臣)이 아니라고 하는 평을 받았던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 문장의 빛남에서 보다 그 후 제갈량이 보여주었던 충성스러운 행동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출사표를 써 국민들에게 바친다. 기초의원으로, 시ㆍ도의원으로, 시장ㆍ군수로, 국회의원으로, 기타 단체장으로 나서며 출사표를 쓴다. 그러나 이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출사표들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일회용 연설문으로 그 사명을 다하고 휴지가 되곤 한다. 그래서 국민들은 거짓말쟁이 양치기에게 속은 마을사람들처럼 이제는 그 어떤 말에도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으레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거니 한다. 지난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내건 공약(公約) 중에서도 많은 것들이 이미 공약(空約)으로 판명되고 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을 제시하면 무엇 하나 다 공염불인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훌륭한 기초단체장이 되어서 이런저런 일들을 꼭 이루어 시민들을 위해 더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이 한 몸 바쳐서 꼭 이루겠다고 목청껏 외치던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보다 더 큰 정치적 입지를 위해 시민과 국민에게 한 약속들을 자신의 임기 중에 헌짚신 버리듯 팽개치고 변신(變身)에 변신을 거듭하는 요즘이다. 그래서 시민들 사이에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정치인들에게 재선거의 비용을 물리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왜 신의(信義) 없는 그들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낭비해야 하는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여사는 일꾼과 삯꾼을 구분해 말씀하셨다고 한다. 오늘도 내일도 그것이 자신의 일임을 알고 내일을 위해서 오늘 조금 더 일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일꾼이요, 하루 그저 시간을 채워 하루 몫의 자신의 삯을 챙기는 사람을 삯꾼이라 하셨다. 내가 보기에는 오늘의 정치인 다수가 국민의 일꾼이 아니라 삯꾼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難題)를 만나면 제 임기 동안에만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온갖 변명과 핑계로 느물거리다 앞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겠다 싶은 일엔 쌍나발을 불어제친다. 오십년 뒤, 백년 뒤의 걱정은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나 물어보란다. 이게 삯꾼이지 어디 일을 믿고 맡길 일꾼이겠는가? 제갈량이 출사표를 바치고 나간 후 그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따라가 보자. 저 유명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故事)를 비롯해 스스로 벼슬을 깎고 오장원에서 죽을 때까지 먹기는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하는(식소사번:食少事煩) 심사숙고를 다했으며…. 그래서 저 출사표는 지금도 읽는 사람의 눈시울을 젖게 만드는 명문(名文)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비전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 우리 정치인들은 출사표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좌우명(座右銘)으로 늘 오른편 곁에 두고 한시라도 잊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처음과 끝이 다르다면 어찌 그를 국민들이 지도자로 여기고 따르겠는가? 지금도 의적(義賊)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 절정이다. 어떻게 이 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이렇게 큰 공감대를 형성하겠는가? 낮도깨비 같은 이야기겠지만 아마 우리 국민들은 지금 믿을 만한 지도자에 그렇게 목이 마른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다시 출사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