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버섯흰개미들은 높이가 4m나 되는 탑 모양의 둥지를 만든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흰개미들이 어떻게 사람도 쌓기 어려운 이 거대한 둥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1960년대 말 뉴욕시,하버드대 물리학박사 에블린 폭스 켈러는 정원에서 자라는 점균류의 특이한 생활방식에 주목했다. 점균류는 한동안 수천마리가 개별적 단세포생물로 살며 동료들과 무관하게 움직이다 환경조건이 나빠지면 하나의 유기체를 이뤄 행동하고,조건이 좋아지면 단세포로 돌아가는,단세포생물과 무리생활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것이었다. 하등동물에 불과한 점균들의 행동양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켈러가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점균류 가운데 속도조정자 역할을 하는,이를테면 엘리트 세포가 있어 그 명령에 따라 무리를 이룬다는 설명이 통용되고 있었다. 속도조정자 세포는 사람으로 말하면 왕이나 시민대표,대통령과 같은 지도자에 해당하는 셈이어서 당연시됐던 이 속도조정자 가설은 켈러의 점균류 행태 연구를 계기로 기각됐다. 똑똑한 수뇌부가 아니라 우둔한 무리들이 네트워크를 이뤄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으로 행동함으로써 흰개미의 탑처럼 놀라운 복잡구조물이 만들어진다는 '자기조직화'와 창발성(emergence)의 가설은 이후 복잡성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자기조직화와 창발성의 가설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한국사회의 변동은 바로 이 창발성의 결과가 아닐까. 87년의 6월항쟁,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대통령선거,미군장갑차 사건 촛불시위,탄핵반대 촛불시위,아직도 기억의 주마등에서 돌고 있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현상들이 왜,어떻게 벌어졌는지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개체나 집단의 특성상 본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점균류나 개미의 행태를 인간사회에 곧바로 유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미연구가들은 개미 집단이 애니메이션 영화 '개미'에 등장하는 권위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와는 정반대임을 밝혔다. 특히 여왕개미는 '권력자'와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여왕개미는 단지 알을 낳고 일개미로부터 보살핌을 받기는 하지만,일개미들이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왕'개미란 단지 인간의 정치적 유추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소위 '목적적 지배'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왕초도 있고,여왕개미도 있다. 왕초는 독재자가 되어 수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을 기도하거나 인간개조를 위한 전체주의사회를 설계하기도 하지만,민주적 지도자로 선출돼 혁신이니 개혁이니 하며 메가프로젝트를 기획해 상전벽해식의 '위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사회의 변화는 이들 왕초나 여왕개미들의 조화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 물론 그들도 변화를 일으키기는 한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도 했고,변화와 개혁을 외치기도 했으며,남북정상회담을 하거나 한국식 '마니풀리테'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동적인, 너무나 역동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는 이들 속도조정자들의 '위업'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때로는 들쥐로,때로는 붉은 악마로 불리기도 했던 무수한 시민들,개인으로서는 천차만별이지만 대중으로서는 단순무구 그 자체인 이들 시민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자기조직화를 이루고 개체 수준에서는 없었던 특성을 집단 수준에서 발현시키는 창발성을 드러냈던 것은 아닐까. 단순한 슬픔이거나 열망,정의감일 수도,불의에 대한 평범한 반대나 저항일 수도 있었던 보통사람들의 행동이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돼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광장으로,촛불시위의 장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보하듯 걸어 나와 탄핵반대 촛불을 든 사람들을 누군가 원대한 계획으로 지휘하고 통제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눈만 뜨면 비전과 개혁을 외쳐왔던 우리의 왕초와 여왕개미들이 명심할 것은 간단명료하다. 정녕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바로 그 보이지 않는 시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왕초와 여왕개미들의 이야기만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