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평화공존' 6·15선언 되려면..申一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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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一澈 <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
6·15공동선언 4주년 기념 행사들이 거창하게 치러졌다.
지난주 인천의 우리민족 대회는 6·15선언의 성격을 '민족자주·민족대단결·평화선언'으로 규정했다. 평화선언이 평화공존의 의미로 구체화됐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적당히 얼버무려지고 말았다.
6·15선언은 잘 알다시피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의 결실이다.
'햇볕'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특히 한반도 비핵화가 근본목표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94년의 제네바 북핵 합의가 깨지고 91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의 민족공조적 합의도 북한 지도부에 의해 무시됐다.
지난 4년 동안 우리가 인식하게 된 북한의 체제 연명책은 역시 불투명성,불가예측성,상호주의 부정의 전술임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해하게 됐다.
지난 4년 동안 우리측의 아량과 양보,인내가 컸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최근 "평양으로 참 무거운 발걸음을 했고 김정일 위원장과의 단독회담 중 '이거 안 되겠다'고 일어나서 서울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한 때가 두 번 있었다"고 회고했다.
북한대표까지 와서 권유한 김 전대통령의 특사설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순서이고 재차 평양에 찾아간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6·15선언에는 불행히도 남북간에 합의된 해석이 없다.
한국측은 이 선언의 기본성격을 '평화공존'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북측은 연방제를 지향하는 '통일선언'으로 보고 있다.
이 선언의 제2항은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남측의 연합은 두 주권국가간의 국가연합이다.
그러나 북한측은 낮은 단계 연방제를 고집해 하나의 연방국가 아래에 두 개의 지역정부가 자리하는 소위 고려연방제 모델을 전제하고 있다는 추정을 해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평화공존은 두 개의 국가가 전제된 국가연합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후르시초프가 제기한 바 있기도 한 '평화공존'개념을 북한은 줄곧 기피해왔다.
이런 상황에서의 지방천도는 '통일수도 서울'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깊은 우려를 갖게 된다.
올해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남과 북의 조선민족과 미국의 대결'을 내걸고 '우리 민족끼리'를 내걸었다.
이후 줄곧 민족공조의 대남선동이 요란스럽다.
반미친북 운동권에서는 대한민국의 안보적 토대인 한·미동맹 50년을 폄하하면서 북한의 계급주의적인 민족 개념이 우리의 통상적 민족개념과 같다고 가정하고 있다.
2001년 8·15 방북 때 북한의 통일헌장탑 준공식에서는 민족을 '김일성·김정일 민족'으로 선언할 정도였다.
남북한 간에 민족개념에 대한 합의부터 필요한 상황이다.
3항의 '민족경제'개념도 동일통화를 사용하는 단일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허구다.
최근 북한의 언론매체와 인터넷망은 미군철수와 반미 선동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끼리'를 화두로 내세우며 7·4공동성명의 반외세적인 통일원칙만 유독 강조하고 있다.
남북한이 국호를 서로 명기하고 합의한 첫 번째 문서는 7·4성명이 아니라 남북 기본합의서였고 기본합의서는 평화공존과 불가침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6·15공동선언의 전문에서도 91년 남북합의서는 사라져버렸다.
김대중 전대통령도 6·15선언 후 북한 지도자의 서울답방이 실현된다면 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군사적 불가침을 재확인하겠다고 미국 방문중에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선군'의 군사정치를 들고 나왔다.
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군사적 긴장완화,신뢰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6·15선언의 위상은 대단히 허전한 것이 되고 만다.
6·15선언이 진정한 평화공존 선언으로 다시 살아나려면 남북한간 기본합의서를 재확인하는 절차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
체제 실패로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과는 통일에 앞서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거쳐야 하는 것이 순리이고 정직한 담론이다.
그 점에서 6·15선언은 불협화음만이 튀는 미완성 교향악이 되어왔다.
한반도 평화의 남북협주교향악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