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어떤 隔世遺傳 .. 金秉柱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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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들판에서 말을 달리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집은 매우 소박하다.
짐승가죽과 나뭇가지로 얼키설키 둥글게 만든 천막을 치고 살다가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옮겨가는 게 그들의 주거 양식이다.
이들은 집단으로 뭉치는 결속력이 강하고 전투력이 뛰어나 역사상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의 후예인 바부르가 아프가니스탄 본거지를 떠나 인도 전체를 평정하고 무굴제국(1526∼1858년)을 세웠다.
'무굴'이란 '몽골'을 뜻하는 말이다.
바부르 이래 6대째 진출한 왕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아크발(1556∼1605년 재위), 샤자한(1627∼1658년 재위), 오랭잽(1658∼1707년 재위)이 특히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수도를 자주 옮긴 공통점을 가졌다.
공들여 마련한 왕성을 버리고 홀연히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을 서슴없이 해치웠다.
오늘날 세계적 관광명소가 된 아그라 서쪽 40km쯤 떨어진 곳에 아크발 왕이 짓고 고작 14년 살다가 버리고 떠난 파테풀 시크리 왕성을 볼 수 있다.
적색 사암을 재료로 만든 이슬람 건축술과 힌두 장식예술이 합쳐진 걸작이 그대로 멀쩡하게 남아 있다.
라호르로 옮겨간 그는 아그라에 왕성을 짓기도 했다.
유목민의 후손이었기에 쉽게 떠나고, 절대군주였기에 민초들의 노역에 둔감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손자 샤자한은 사랑하는 왕비가 출산 후유증으로 숨지자 백색대리석 묘소를 지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타지마할이었다. 자신의 묘소를 동일한 모양으로 흑색대리석 재료로 건립할 계획이었다 한다. 아버지가 묘원건축에 국력을 탕진하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자 하나가 부왕을 감금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오랭잽이었다. 그러나 그도 왕성 옮기기를 거듭했다. 오늘날 아잔타 동굴을 답사하는 사람들이 오랑가바드 가까운 길목에서 잠시 머물게 되는 폐허도시가 바로 그가 세운 왕성이었다.
무굴 왕들 통치하의 백성들 생활은 어떠했을까? 잦은 천도, 기념비적 건축 등은 재정지출을 키웠고, 과중한 조세와 힘든 부역에 눌린 백성들의 저항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이를 제압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은 다시 무거운 부담으로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이는 마침 동쪽으로 뻗어온 유럽 열강에 침략의 호기를 제공했다.
한동안 이름만으로 연명하던 무굴 제국은 드디어 1858년에 멸망했다.
한민족도 출생시 엉덩이에 푸른 반점처럼 몽골족과는 혈연적으로나, 언어ㆍ풍습 등으로 미뤄 유사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몰랐던 것은 주거지 옮기기,수도 바꾸기의 유전인자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도시인들의 빈번한 이사 성향은 부동산 투기 열풍을 달궈 왔다.
요즘 갑작스런 수도 옮기기 논의는 6백여년만에 처음 나타나는 돌연변이 현상이다.
잠재했던 유전인자가 몇 대를 뛰어넘어 불쑥 나타나는 것을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 한다. 우리가 유목민 후손임을 입증하려 함인가?
그렇다면 왜 그리도 오랫동안 천도를 자제해 왔던가? 그것은 조선왕국 초기에 정도전의 탁월한 입지선정 때문만이 아니라, 주먹구구로나마 천도에 따른 비용편익 분석을 해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큼 크고 호화로운 건축물과 예술품이 희소한 것도 재원한계 때문이고, 감행했을 경우에 뒤따르는 민초들의 생활고를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조시대 왕들도 말이다.
21세기 초 한국은 할 일이 태산이다.
국제경쟁력 키우기, 경제 규모 늘리기, 일자리 만들기, 분배 몫 다툼 잠재우기, 튼튼한 국방력 만들기, 통일 대비하기 등 목돈 들어갈 곳이 수두룩하다.
지난 대선 때 표를 얻기 위한 반짝 발상에 정권의 명운을 걸 까닭이 없어 보인다.
벌써 국민의 조세 부담률이 20%선을 넘어섰고, 여기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준조세를 보태면 부담률은 더 올라간다.
이만한 대역사(大役事)를 굳이 고집하겠다면 첫 삽 뜨고 다음 정권에 후속단계 사업을 넘겨라.
유한한 자원의 제약을 푸는 슬기로운 방법은 시간을 통해, 세대를 통해 난제를 나누어 해결하는 통시적(通時的)분업이다.
유목민족의 유전인자를 이성으로 눌러야 무굴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고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