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 개청 이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김선일씨 피랍 테이프를 둘러싼 통화여부를 놓고 '진실게임'을 벌이듯이 외교부와 AP가 이틀째 팽팽히 맞섰으나 사무관 2명이 전화를 받은 것으로 25일 드러남에 따라 외교부는 신뢰와 도덕성 측면에서 치명상을 입게 됐다. 물론 AP측이 큰 '특종'을 확보하고도 좀 더 치밀한 추적을 하지 않은 점과 테이프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 등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외교부도 '해외 자국민 보호'라는 기본 업무를 망각, 김씨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참극 책임 공방과 정부 도덕성 논란 가열될 듯 김선일씨가 안타깝게 피살된 데 이어 외교부 공직자의 무사안일이 드러나면서 "외교부를 근본적으로 수술하라"는 요구가 정치권을 비롯해 네티즌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전쟁터에서 활동 중인 국민이 납치됐다"는 소식이 세계적으로 유수한 통신사로부터 사실 확인 요청 형식으로 들어왔는 데도 초급 간부인 사무관이 상부에 보고조차 않은 채 묵살한 데다,통화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근무태도부터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외교부는 김씨가 피살된 사실이 전해진 30분 전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희망적인 조짐이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해외 정보력에서도 수준 이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보고체계,정보력,대응력,협상력 등 외교 역량과 근무자세에서 총체적인 부실이 증명된 셈이다. ◆문책인사 불가피할듯 감사원 조사 결과가 나오면 외교부의 문제점이 조목조목 백일하에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것만으로도 외교부는 존폐의 기로에 선 셈이다. 외교부의 잇달은 실책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와 국가정보원 등 '사촌기관'으로도 불똥이 튀었다. 수천명의 국군 '비전투 부대'가 파견될 격전지역에 대한 정보와 현지의 주요 활동 주체 및 연결선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는지에 대한 우려가 높다. 청와대도 이 같은 여론을 제대로 인식,발빠르게 감사원에 조사를 요청했고 "외교부뿐만 아니라 국정원 NSC 국방부까지 조사대상"이라고 발표했다. 청와대가 헌법기관인 감사원에 대상 부처를 적시하면서 조사하라고 요청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현 정부 내 외교·안보라인이 뿌리째 흔들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거듭 강조해온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정부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교부를 비롯한 외교·안보라인의 대대적인 수술과 함께 실무자부터 최고책임자까지 대규모 인책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측이 청와대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유사사태 재발 방지될까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다. 중동 기업체와의 교역과정 등에서 또 다른 형태의 테러가 감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추가 파병이 본격화되면 이 같은 잠재위험은 더욱 가시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외교 안보 역량으로는 역부족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노 대통령의 주된 관심도 예측하기조차 쉽지 않은 추가 테러를 막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동안 타성에 젖은 안일한 근무태도와 한계를 드러낸 역량으로 제대로 대응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남북한 대결구도에서 국제 테러조직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선 상황에서 외교 안보에 대한 노 대통령의 개혁안이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허원순·정종호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