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여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모래시계의 무정함 속에서 안타까웠던 태수와 혜린의 가슴 아픈 사랑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형장으로 향하는 태수가 던진 한 마디 "나 떨고 있니?"라는 말을 아직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름만으로도 유명세를 치르는 선배의 공연을 찾았다.
선배는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을 나서며 "나 떨고 있는 거 보이냐,안 보이지?"라며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애써 웃어 보였다.
연주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선배에게 이번엔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도 떨려? 형 정도면 이제 뻔뻔스러워져야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걸,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업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렇게 선배를,아니 나를 다독인다.
이제 집에 가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두 다리 쭉 뻗고 실컷 자야겠다는 선배가 왜 그리도 안쓰럽던지.
'모래시계'의 감동을 재연하기 위해 촬영장을 찾아가고,드라마 속 인물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처럼,실연(實演)의 짜릿한 긴장감과 감동을 즐기기 위해 관객들은 연주장을 찾는다.
하지만 무대 연주란 TV 녹화장의 태수나 혜린처럼 대사를 잊어버리거나,어색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단 한번 주어진 시간 안에 연주자는 온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하지만 연주자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완벽한 연주를 들려줄 수는 없다.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연습에만 몰두하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들이 막상 무대로 향하는 모습은 어떨까.
사형장으로 향하는 태수의 걸음보다 더 처절하고 두려운 시간일 것이다.
연미복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고,머리 속은 온통 하얗게 되어 악보의 첫 마디조차 기억나지 않는,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싶은 공포가 엄습한다.
이전의 연주를 망친 연주자라면 그 공포는 더욱 극에 달할 것이다.
무대 공포에 떨고 있는 연주자를 위한 처방전은 그들의 실수도 너그럽게 봐주고,뜨거운 마음으로 격려해주는 관객들의 박수일 것이다.
이제부터 하루에 1분 아니 10초만이라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박수를 연습해 보자.대기실에서 그리고 무대에서 떨고 있을 그들을 위해.
ybkim@s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