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몇 벌이나 팔릴까? 장한평의 김 사장한테 밀린 대금을 결제해 주어야 하는데,돈은 또 어떻게 마련하나?"

서울 동대문 청평화시장에서 의류 도매상 '리치데이'를 운영하는 신창철 사장(45)은 지난 8일 새벽 4시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장맛비가 멈춘 터라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신 사장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래업체들의 부도와 판매부진을 견디지 못해 가게 문을 닫은 이웃 점포 주인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지난주만 해도 같은 층의 박모 사장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떠났다.

"옷장사를 시작한 지 17년째지만 올해 같은 불황은 처음입니다.

작년의 절반도 팔리지 않아요.

IMF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청평화시장은 반품은 안해주는 대신 옷을 싸게 팔기 때문에 동대문에서도 경기를 덜 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 사장은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어 가게 문을 열지만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새벽 4시50분쯤 되었을까.

첫 손님이 들어섰다.

"저 운동복 노란색과 연두색,아이보리색으로 두 벌씩만 주이소." 마수걸이 손님이라 혹시나 싶어 기대해 보지만 역시 낱장 주문뿐이다.

워낙 경기가 없다 보니 소매상인들도 올들어서는 대량 주문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낱장 주문도 물건이 괜찮으면 추가 주문이 들어왔으나 요즘은 이조차 드문 일이 됐다.

6시 반.

문을 연지 두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가는 이미 파장 분위다.

2층 통로는 손님 대신 아침을 나르는 식당 아주머니들로 분주했다.

신 사장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인근 점포의 이종대(45)씨는 "장사도 장사지만,부도내는 소매 상인들 때문에 타격이 크다"며 "올들어서만 벌써 여섯군데에서 부도를 맞았다"고 하소연이다.

또 다른 가게의 임성준(53)씨는 "불황때 유행을 더 탄다"며 "유행을 잘 맞춘 몇 집만 잘되고 나머지 가게는 더욱 힘들어지는,침체 속의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신 사장 주변 점포만 해도 올들어 40군데 이상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이다.

아침 장사가 마무리 되는 오전 10시.

신 사장은 원단을 구입하기 위해 인근 동대문 종합상가로 향했다.

청계천 도로변 곳곳에는 지방으로 화물을 보내 주는 택배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대문 상가에 손님이 없다보니 이들의 일거리도 당연히 격감했다.

부산쪽 항공화물을 취급하는 "아트 항공"의 한 직원은 "물량이 작년의 40% 수준으로 줄어들어 운송료를 30% 이상 낮췄다"고 말했다.

신 사장은 장안동,중화동,왕십리,종암동 등 4개 하청공장에 생산을 맡기고 있다.

장안동 공장에 들어서자 김정표 사장(45)이 마중을 나왔다.

15명 직원의 월급을 주려면 하루 천 장 정도는 나가 줘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고작 2백~3백장입니다"

김 사장이 직원 월급을 언급하자 신 사장은 "나도 아직 한 달 밀렸죠"라며 머쓱하게 웃는다.

오후 4시.

신 사장은 가게에 잠시 들른 후 신촌으로 발길을 옮겼다.

유행을 파악하기 위해 그는 저녁 늦게까지 젊은이들이 어떤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입는지 관찰했다.

불황이 깊어진 요즘 그의 퇴근 시간은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쉴 틈도 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현장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불황"에 대해 묻기가 미안해졌다.

송주희 기자 y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