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톈진(天津)에서 등산화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기업 H사. 이달초 생산라인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모든 기계가 멈춰섰다.

이렇게 시작된 예고없는 단전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1991년 중국진출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영상 37도가 넘으면 "반드시" 전력이 끊어집니다. 오후 2~4시 사이에는 아예 공장을 돌리지 않습니다. 대신 조업시간을 오전 8시에서 5시로 앞당겼습니다." (H사 관계자) 인건비 부담 등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생산비용 증가를 이기지 못하고 중국으로 공장을 옮긴 한국 기업들이 열악한 전력사정으로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성수기를 앞두고 여름철 24시간 공장가동에 들어가야하는 전자,가전,완구,섬유 등 국내 대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대기업도 예외없다

베이징현대자동차는 2002년 공장가동 후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여름휴가를 보내주기로 했다.

베이징시가 올 여름 전력부족이 40만kW에 이를 것으로 보고 지난 주부터 6천3백89개사를 대상으로 한 달 동안 돌아가며 1주일간 강제휴무제를 실시키로 결정한 것이다.

물건이 없어 못 팔고 있지만 전력부족으로 생산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달 말부터 5일간 공장을 세워야 한다"며 "베이징시가 당초 9일을 요청해왔지만 그나마 이 정도 줄인 것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1주일에 일요일만 휴무를 실시해온 이 공장은 지난주부터 수,목요일 쉬는 대신 토,일요일에 공장을 돌리고 있다.

평소보다 일주일에 하루를 덜 일하는 셈이다.

생산대수가 13% 정도 줄어들어 올해 계획된 사업목표를 맞추기가 사실상 어려워졌다.

중국 정부가 외자기업 중 규모가 큰 기업을 특별 관리해왔던 '관례'를 감안하면 현대차의 상황은 중국 내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4시간 TV용 편향코일을 생산하는 LG필립스디스플레이는 작업 중에도 공장 내 형광등의 절반을 꺼놓고 있다.

일부 에어컨에는 아예 '팅즈(停止)'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사무실 에어컨도 오전 10시∼오후 3시 사이에만 켤 수 있도록 했다.

평소 전력량의 24%를 무조건 줄이라는 시 정부 지침에 따라 생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하는 조치.

원래 토요일 특근형태로 근무하고 일요일만 쉬었는데 지난주부터 수요일과 목요일로 휴무일을 바꿔 토,일요일 대체근무를 실시 중이다.

이 회사도 오는 29일부터 내달 4일까지 시정부 지침에 따라 일주일 동안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난징의 LG전자 모니터 공장도 '올빼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 전력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평일 야간작업을 통해 낮에 못한 일을 보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차별적인 전력공급 중단

그동안 전력난의 무풍지대로 여겨온 북부의 베이징 톈진 칭다오 등도 전력부족 사태를 빚으면서 이 지역에 밀집한 국내기업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칭다오의 경우 이달 들어 최근 10년만에 처음으로 시내 공장에 대한 제한송전이 시작됐다.

박환선 주칭다오총영사관 영사는 "지난 주부터 칭다오 전 지역의 전력소모가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이틀 쉬도록 지정하고 전력소모가 작은 기업들은 오전 11시∼오후 6시로 작업 시간을 줄이도록 강제조치했다"고 말했다.

대농방직 김인송 총경리는 "방직공장은 장치산업인데 완전가동을 할 수 없어 답답할 지경"이라며 "하루 평균 2천9백kW 전력이 필요한데 시 정부가 지정한 날에는 1천kW를 절전하라고 해 공장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월 작업일수가 평균 2일 이상 줄어들면서 생산량도 8% 이상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시 외곽에 있는 30여개 한국 협력업체들의 경우 제한송전이 더욱 심각해 작업스케줄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또 다른 이 지역 회사 관계자는 "미국 수출 성수기인데 하늘만 쳐다봐야 한다"며 "시 당국에 미리 단전 시기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온도가 너무 올라 전력부하가 많이 생기면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답변만 돌아올 뿐"이라고 말했다.

양쯔강 이남,상하이 주변도 전력난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 지역의 LG전선 냉동공조기 생산공장은 내달부터 일주일에 이틀 정도 송전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톈진의 삼성테크윈 카메라 공장도 화요일 일부 라인의 가동을 멈추고 미처 생산하지 못한 물량은 주말에 생산하고 있다.

절전일에 규정된 전력사용량을 초과하면 곧바로 단전조치를 내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납기와 품질유지에 비상이 걸린 상태"라며 "중국정부의 긴축정책과 전력수급의 정책실패로 현지기업들이 최악의 시련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이심기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