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부 전직 관료들이 '야인 시절' 국민은행으로부터 자문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상당수 언론들은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며 질타했다.

혹시 나중에 한 자리 하면 잘 봐 달라는 은행측의 '보험료'를 받아챙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러나 자문료 파문이 확산되면서 여론의 관심은 점차 자문료 '액수'로 옮아갔다. 방송을 포함한 일부 매체는 도시근로자 평균소득까지 들먹이며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뭐 특별한 일을 했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았느냐는 식으로.

이같은 시선은 최근 사회상황과 맞물려 적지 않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 듯하다.

돈으로 얽힌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고리가 줄줄이 드러난 가운데 때마침 "부자가 싫어 살인을 했다"는 연쇄 살인범도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에는 사법연수원생 가운데 70%가량이 대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부(富)'에 대한 거부감이 살인범에서부터 예비 판·검사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일 '사임설' 진위를 묻기 위해 만난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서 고가(高價) 보석을 덥석 사면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데 똑같은 보석을 국내에서 사면 '더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된다"거나 "부자들이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들이 돈 벌 기회를 잡게 된다"는 얘기속에는 '부'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우려하는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었다.

지난 주말 한 드라마에서는 재벌 회장이나 국회의원 부인 같은 부유층이 어렵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 '삼류 인생'이라고 면박을 주거나 뺨을 때리며 괴롭히는 장면이 나왔다.

이 드라마는 요즘 시청률 50%대를 오르내리며 잘 나가고 있다.

최근 들어 내수회복 지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주머니를 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늘상 문제가 되는 청년 실업이나 투자 부진도 움츠린 '부자'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이제 배 아픈 게 나은지,아니면 고픈게 나은지 결론을 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안재석 경제부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