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 납치돼 참수 위협을 당하는 외국인들의 소식이 거의 매일같이 보도되고 있지만 '납치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 외국인만은 아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 이후 치안 공백 속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 납치하는 범죄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어 이라크의 평범한 시민들이 공포에 떨고있다고 22일 보도했다.

저널에 따르면 이라크의 납치사건은 경찰에 신고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정확한통계를 낼 수 없지만 이라크 내무부 관리들은 하루 평균 10-30건의 납치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치가 `가장 번창하는 사업'이 되고 있다는 멕시코나 콜롬비아에서도 연간 납치사건이 2천여건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라크의 납치사건 빈도가 얼마나높은지 알 수 있다.

저널에 따르면 납치 범죄 조직들은 경호원을 고용하고 집과 주변을 요새화해 접근이 어려운 부유층보다는 중산층 이하의 민간인들을 주로 표적으로 삼는다.
납치동기는 단 한가지, 돈이다.

유나단 카나 전(前) 과도통치위원은 "이라크 역사상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납치되고 있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이런 사태는 정치나 종교, 인종 등 어떤 문제와도 관련이 없고 오직 돈에 관련돼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저널은 보도. 납치범들이 요구하는 몸값은 수백달러에서 수십만달러까지 다양하지만 대개는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이들은 피해자 가족들이 요구한 몸값을 내놓지않거나 제 때 갖다 바치지 않을 경우 인질 살해도 서슴지 않는다.

범죄 조직의 무차별적인 납치 대상에는 경찰도 예외가 아니어서 경찰 고위 간부인 이브라힘 하마디는 15만달러를 주고서야 범죄조직에 납치됐던 처제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 하마디는 자신이 경찰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해 퇴직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횡행하는 민간인 납치는 이라크인들의 생활양상을 크게 바꿔놨다.
부유층 주거지역에서는 등하교 시간마다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차량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고 보통 새벽 2시까지 흥청거리던 식당에서는 밤 손님이 뚝 끊겼다.

납치범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는 의사들은 학술 세미나에서 정해진 주제는 젖혀둔 채 납치 문제에 관해 토의하기 일쑤다.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의사만 200명이 넘는 상황에서 의사들의 국외 탈출은 러시를 이루고 있고 이로 인해 초래된 의료공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저널은 전했다.

저널에 따르면 이라크 내무부의 범죄전담팀을 이끌고 있는 파이잘 알리 알 도사키 대령은 "이라크에는 법이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믿고 있다"면서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뉴욕=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