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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에세이] 여백만큼 채워지는 감동..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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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배 < 예술의전당 사장 ybkim@sac.or.kr >


    "아저씨,좀 더 빨리 갈 수 없어요?" 약속 시간에 늦은 나는 택시 기사를 재촉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치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듯 예비신호에는 미리 서고,끼어들기 차들에 자리를 내주면서 마냥 느긋하기만 하다.

    "아저씨,죄송한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다시 한번 채근하자 "서울 시내에서 빨리 가면 얼마나 빨리 가겠어요? 별 차이 없습니다"라고 느긋하게 대꾸한다.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는 나에게 "부산까지 가는데 규정 속도를 위반하면서 달리는 차와 규정 속도를 지키며 달리는 차 중에 누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요? 물론 빨리 달리는 차겠지요.

    그런데 도착시간은 별 차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운전자의 스트레스는 거의 30배나 된다고 하는군요.

    손님이 자꾸 재촉하면 내 수명을 단축하는 겁니다"고 핀잔을 준다.

    다행히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고 그날 이후 '빨리 빨리'라는 말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 부산에 가기 위해 고속열차를 탔다.

    2시간40분이라는 경이로운 속도와 과학기술의 발달에 놀랐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졌다.

    다섯시간 동안 이리저리 몸을 뒤틀다 식당차에서 도시락으로 배를 채우고,포만감에 차창 밖의 풍경을 즐기며 잠들던 새마을호의 여유로움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고,느림보의 여유로움도 서둘러 사라지고 있다.

    며칠 전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후배에게 전수(?)해 줄 생각으로 연주회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만나자고 불러냈다.

    공연시작 10분 전에 로비에서 만나자던 후배는 저녁을 사주겠다는 나의 제안에 두말 않고 달려 나왔다.

    우리는 저녁을 넉넉하게 먹고,연주회장 주변을 산책하며 짙어가는 여름의 소리를 즐겼다.

    그리고 시원한 녹차와 함께 오늘의 연주 프로그램을 찬찬히 훑어보고,서로 다른 설렘을 안고 연주회장에 들어섰다.

    무대 위의 악기들을 바라보며 마음 속에서는 감동을 위한 튜닝이 시작되었다.

    휴식시간,연주 내내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후배가 "형,오늘 저녁 식사와 연주 모두 감동 그 자체인 걸?"하며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지나간다.

    어리숙한 선배의 가르침을 그새 알아차린 것일까.

    감동은 그것을 위해 비워놓은 마음의 여백 크기만큼 커진다는 것을 벌써 느낀 것인가.

    후배는 공연 후 시원한 맥주를 사겠노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의 즐거운 그림자를 따라가는 나 역시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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