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홍 < 서울보증보험 사장 jung45@sgic.co.kr >

내가 어렸을 때,동네 어귀에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동네를 드나들 때 이곳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기도 하고 일용품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돈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 "달아 노쇼"이 한 마디만 하고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가게 아줌마는 깜박할세라 치부책을 꺼내 들고 몽당연필로 거래 내역을 적어둔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외상값을 갚으면 된다.

오래도록 갚지 않으면 독촉도 하지만,갚을 능력이나 의사가 없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외상 거래는 사절이다.

극히 초보적이지만 그런대로 신용관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이런 관행이 모태가 돼 요즈음의 신용불량자 관리제도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너무 엄격해서 운영의 묘를 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옛날 같으면 비록 몇 개월씩 연체가 있어도 상환 능력이 있으면 그런대로 거래가 가능했는데,지금은 연체 3개월이면 무조건 신용불량자로 분류돼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용불량자가 3백70만명에 이르게 된 건 당연하다.

그 중에는 몇십만원 수준의 소액 신용불량자가 수십만명,2천만원 미만의 관리 가능한 수준의 연체자만도 2백만명을 훌쩍 넘어선다.

이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단순 연체자일 뿐 신용불량자는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경직된 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잘못된 제도라면 고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봤더니,신용불량자 숫자를 축소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문제점을 알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모 기자의 전언이다.

아이러니다.

문제를 사실보다 훨씬 크게 튀겨놓고 신용불량자 문제가 우리 경제의 큰 걸림돌이라고 외쳐댄다.

물론 상환 능력을 고려치 않은 무절제한 소비 주체들이 보호돼서도 안되지만,과도한 멍에로 경제활동을 제약받아 돈 벌어 빚 갚을 기회조차 원천봉쇄돼서도 안된다.

직접 비교하긴 무리가 있지만 오래 전 구멍가게 아줌마의 투박한 안면신용제도가 지금의 신용불량자 관리제도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개운치 않다.

최근 도입된 배드뱅크 제도,신용회복위원회의 각종 지원제도 등을 활용해서 상환 의지가 확인된 준(準)신용불량자의 손발을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풀어줘야 한다.

제도에 허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즉시 보완해 이 난관을 슬기롭게 넘기고 우리가 소망하는 성숙한 선진 신용사회에 조속히 합류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