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가 지난 주말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의 기본 골격에 관한 합의문을 채택했다.

WTO 1백47개 회원국이 채택한 이 합의문은 어떤 품목의 관세를 얼마나 인하할지, 어떤 서비스분야에서 외국인 투자를 얼마나 허용할지, 무역을 왜곡하는 보조금 지급을 언제까지 중단할지에 대한 최종 합의는 아니다.

그러한 타협점을 이끌어 내기 위한 협상방식, 시한, 원칙 등 실질적인 무역자유화 협상을 위한 틀에 합의한 것이다.

DDA협상을 2005년 1월1일 시한을 넘어 제6차 각료회의시까지 계속하고 제6차 각료회의는 2005년 12월 홍콩에서 개최키로 결정한 것, 농업분야의 보조금과 관세의 감축방식에 대해 이견차가 좁아진 것, 비농산품에 대해서는 모든 회원국에 비선형인하 방식(관세가 높을 수록 높은 감축률을 적용)을 채택하기로 한 것, 서비스 분야는 각 회원국이 수정 양허안을 2005년 5월까지 제출하기로 한 것, 투자 경쟁정책 정부조달투명성 등에 대해서는 DDA협상에서 제외하기로 한 것 등이 중요내용이다.

실질적인 시장개방에 합의한 것이 아니고, 협상의 기본틀에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곧 미국 대선이 있고 그 이후 DDA협상에 대한 미국 행정부와 의회간의 힘겨루기가 끝나야 DDA협상은 본격적으로 다시 재개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WTO의 합의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WTO로 상징되는 다자무역체제는 이번 합의로 발등의 불은 끈 셈이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가 농산물 공산품 서비스를 종합하는 국제무역규범을 태동시키고 규범의 준수와 후속 협상을 위한 국제기구로 WTO가 1995년 출범될 때만 하더라도 세계무역환경은 쾌청했고 WTO는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위해 순항하는 것 같았다.

20세기를 이념적으로 양분시키고 자유진영을 위협하던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역사는 '시장과 경쟁, 그리고 무역과 투자'를 선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거센 풍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21세기의 무역규범을 창출하려던 1999년 시애틀 WTO 각료회의는 회의장 안에서는 선진국의 일방적인 독주에 불만을 품은 개도국들의 강력한 반발과 회의장 바깥을 점거한 반세계화 단체들의 폭력시위 속에 참담하게 실패했다.

충격에 휩싸여 방향감조차 상실한 WTO 다자체제를 구출한 것은 2001년 9·11사태가 초래한 위기였지만, 2003년 9월 칸쿤 각료회의는 DDA협상의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의 협상골격 합의는 WTO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DDA협상은 최종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자협상은 협상참여국들의 경제발전 단계가 상이하고 협상에서의 손익계산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복잡한 방정식의 해를 찾는 작업이 쉽지 않다.

1999년 시애틀의 좌초를 촉발시켰던 개도국들, 2003년 칸쿤을 벼랑 끝으로 떨어뜨렸던 개도국들은 성난 목소리와 강력한 결속력으로 농업과 섬유의 무역자유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농업과 섬유 수출은 처절한 빈곤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데 한국은 농업분야를 보호해야만 하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있다.

DDA협상 초기부터 한국정부는 농업분야에서의 개도국 지위를 지키겠다고 공언해 왔다.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과연 그것이 한국경제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지를 곰곰이 따져 보지 않고, 협상의 모양과 외형에만 치중한다면 DDA협상은 쌀개방 저지로 일관하던 우루과이라운드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크다.

더 우려할 것은 DDA 협상이 난항을 거듭해 시장개방의 시점이 늦춰질 수록 우리에게 오히려 호재라는 일부의 인식이다.

시장개방의 늦어질 수록 우리의 체질을 단련시키고 선진화할 수 있는 기회는 뒤로 미뤄질 뿐이다.

2001년 11월 DDA협상이 출범할 때 각 행정부처가 내건 각종 대책, 계획, 위원회 등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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