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베이징이나 멕시코시티보다 못하다'는 정부의 수도이전 홍보 문구는 멋진 역설(逆說)이다.

'겉으로 말이 안되는 상식적 모순이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나타낸 표현'을 의미하는 역설의 뜻 그대로 '서울은 세계 30대 도시 중 삶의 질이 최하위'이고,'외국기업이 투자처로 서울을 외면하고 베이징을 선택'하고 있다.

이 광고가 문제되자 정부는 수도이전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反語法)이라고 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뜻과는 반대되는 말로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반어법이고 보면 궁색한 해명이다.

말꼬리를 붙잡고 나선 것은 국정의 홍보마저 이같은 헐뜯기식의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접근한데 대한 아쉬움부터 앞서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논리의 빈곤이다.

사실 20세기 이후 상당수의 나라가 수도를 옮겼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는 브라질과 호주다.

브라질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안보적 이유도 있었지만) 이미 1892년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내륙 고원지대로 이전키로 결정했으나 실제 옮겨진 것은 60여년 뒤의 일이다.

56년 수도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쿠비체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57년 착공 후 3년만에 행정수도를 만들었다.

지금 브라질리아에 대한 대체적 평가는 '절반의 성공'이다.

브라질리아는 전 국토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 건설을 앞당겼으며 내륙개발을 위한 거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새 수도 건설에 들어간 당시 60억달러의 비용을 토지매각대금으로 충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개발자금 조달을 위한 해외차관과 화폐남발로 20억달러의 국가부채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결국 외환위기를 불러오게 됐고 그것이 한 빌미가 되어 20여년 동안의 군부통치가 이어졌다.

호주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 수도 건설을 추진했다.

연방수도 자리를 놓고 시드니와 멜버른이 치열하게 대립하자 국민통합을 위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했다.

1908년 두 도시의 중간지점인 캔버라로 터를 잡은 것이다.

이후 지난 80년까지 국회 연방정부 대법원 등이 모두 옮겨 왔다.

시드니와 멜버른은 여전히 경제중심지로 남았지만 캔버라는 지금까지 자족기능과 활력을 찾지 못하고 주말이면 주민들이 대거 도시를 떠나는 '공동화'의 문제를 안고 있다.

수도이전에 '지배세력 교체론'까지 덧씌워지면 더욱 복잡해진다.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식민지 독립국들이 권력재편과 국론통일을 위해 수도를 이전했지만 국력의 소진으로 빈곤의 늪을 헤매고 있는 나라들을 찾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굳이 말하면 수도권과밀해소 국토균형발전 국민통합 등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수도이전이 타당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대 모험일 뿐 아니라 성공을 거둘 가능성마저 낮기 때문이다.

하물며 태생이 선거전략이었던 우리의 수도이전은 대통령 임기 말 착공계획부터가 선거를 앞두고 또 다른 정치적 흥정과 이로 인한 국론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음에야.

수도이전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으니 온갖 반대를 무릅쓴다지만,서울 비하로도 모자라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 평택 쯤에서 휴전이 된다면 인구는 5할,국력은 7할 이상 빠져나간다'(그래서 수도를 옮겨야 된다)는 가정법(假定法)까지 나왔다.

정말 이렇게까지 험한 말로 국민들을 불안케 하고,수도이전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새 수도를 건설할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만.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