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남매 중 둘째로 제일 야단을 많이 맞고 자랐다.

어머니께서 엄하실 땐 무척 엄하셨고,똑똑했던 다른 남매들보다 부실한 면이 많아서 그랬겠지만,형제간에 다툼이 나도 내가 야단맞고 울면 집안이 이상하게도 쉽사리 평화로워지곤 했다.

그땐 참 억울했고 서러워 불만도 컸으나 이것이 어쩌면 나의 독립심을 키우고 혼자만의 상상에 젖게 했으며 예술에 깊이 빠지게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친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랬다.

내가 만만한 건지 화풀이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

이 또한 서러운 일일텐데,꼭 나쁜 쪽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어떤 부분 나를 무던하고 너그럽게 만든 점에서 꽤 좋은 결과를 주기도 했다.

물론 재수를 많이 할 땐 절규하며 반항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인생사는 동전의 양면이라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만들고, 서러움을 기쁨으로,손해를 이익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참으로 부끄럽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길 풀어놓아야겠다.

지지리도 부실했던 나는 대학입시도 실패를 많이 했다.

그 많은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에 원하는대로 내가 들어갔다면 아웃사이더의 소외감이나 슬픔을 그렇게까지 못느꼈을 테고,그쪽에 관심도 덜 갔을지 모른다.

혼기를 놓치지 않고 결혼생활도 부유하고 평탄했다면 시와 사진작업을 그토록 열심히 했었을까?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안좋은데도 미대 간다고 재수,좀 다니던 학교도 맘에 안들어 다시 삼수까지 해서 또 떨어진 어느 겨울이 떠오른다.

동생은 좋다는 대학 장학생으로 붙고 나는 떨어져 더없이 챙피해서 눈물만 나던 후기대학 발표날 밤.바람에 문풍지가 울고 내 마음도 울고 하염없이 서러운 밤이었다.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죽음보다 더 우울한 기분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러다 그만 대성통곡까지 터질 때였다.

멀리서 아버지 발소리가 나길래 울음소리를 낮췄다.

"춥진 않냐?" "괜찮아요."

하도 울어 목쉰 소리로 대답했다.

내 방의 아궁이를 열어 아버지는 연탄불을 살피면서 다시 물으셨다.

"누구 원망스런 사람은 없느냐?" "누굴 원망하겠어요. 내가 못한 건데요." "그럼 됐다.그만 푹 쉬거라."

아버지로서는 아마도 사람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모든 게 원망스러우리란 생각에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 같다.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의 이 말씀은 잊혀지지 않고 보석처럼 빛난다.

결국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하고,내 탓이고 내 잘못이란 무언의 가르침이셨다.

그 시절에 깊이 깨달아서 쓴 시가 이번 셋째 시집에 실린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한 말로 스물한 살의 겨울과 지지리도 나약한 내 인생에 경종을 울렸고,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돼 10여년간 무척 고생했다.

결국 치열한 반성이 없어 재수를 그토록 많이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불행과 창피함을 벗어나려고 미치도록 몸부림치며 공부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 인생에는 걸어도 걸어도 길이 잘 보이지 않고 맨날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날들이 허다하다.

그때마다 남 탓만 한다면 어찌 될까.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내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한 자기 발전은 없다.

남탓하는 사람들은 어른이어도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고,인격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어디 문제 없는 인생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심각하게 자신의 생활이나 태도를 반성해야 희망이 보이고 문제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요즘 벌어지는 강력범죄나 여러 현상을 들여다보면 무척 걱정스럽다.

바른 심성으로 이끌 교육의 기회를 마련 못한 사회나 가정의 책임도 크지만 대부분 남 탓으로 돌린 결과에서 빚어진 범죄라 느껴진다.

선량하게 살아온 남의 인생까지 망치고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이 비뚤어진 가치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선,극도의 절망감이 만든다.

그러나 정작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절망은 한가닥 희망의 빛을 찾는 시작임을 우리는 왜 자주 잊고 사는가.

인생을 멀리 보지 못하고 너무 가까이 어둠만 바라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