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을 할 만한 명분도 없었고 요구조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LG정유 파업사태가 심각한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노조의 현장복귀 선언으로 한 고비를 넘겼지만 파업기간 노조집행부의 투쟁방식을 둘러싼 조합원 간의 갈등은 미봉합상태로 남아 있다.

지난달 29일 공장으로 조기복귀한 P씨(중질유분해시설 근무)의 고백은 파업에 참여했던 대다수 노조원들의 고뇌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노-노 갈등이 공장 정상화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도화선이 될 것이란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노조 감시피해 간신히 복귀

파업이 시작된 이후 감시가 심해 복귀를 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찾지 못했다.

노조가 조합원을 조직대와 행동대, 규찰대로 나눠 심하게 감시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조합원으로 구성된 조직대는 회색 옷으로, 젊은 조합원으로 구성된 행동대는 빨간색 옷으로, 강성 조합원들로 구성된 규찰대는 검은색 옷을 입고 조합원을 서로 감시했다.

집행부로부터 산개투쟁 지시를 받고 지방에 가 있다가 이날 새벽 5시30분 조합원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인근 민박집을 샅샅이 뒤진 아내의 차를 타고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 파업까지 갈줄 몰랐다.

교섭이 결렬되고 투쟁을 시작했을 때는 파업까지 갈줄은 몰랐다.

하지만 일단 파업이 시작되자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교대근무를 위해 작업장에 가고 있었는데 노조집행부가 차단해 어쩔 수 없었다.

파업을 할 만한 명분도 아니고 요구조건 또한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안됐다.

조합원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파업 중간에 토론을 한 번 했다.

당시 심경을 얘기하라니까 모두들 파업을 끝내고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노조의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조합이 백기를 들면 조직이 완전히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 민노총에 속았다

돌아와보니 민노총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LG정유 노조가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복귀한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 6일 복귀한 사람들도 '속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미복귀자들도 비슷한 생각일 거다.

집행부에서는 공장이 잘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와보니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휴대폰도 없고 매스컴도 접하지 못해 집행부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노-노 갈등이 더 두려워

앞으로가 더 두렵다.

왕따 때문이다.

파업시작 전 '공동투쟁승리'라는 구호를 외치지 않은 조합원은 그 이후부터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왕따를 당했다.

파업 기간중에 대오이탈자에 대한 처리문제가 나왔는데 '상조회'에서 제명시키고 축구, 야구 등 취미 프로그램이나 회식 자리에서도 빼자고 했다.

회사 복귀 전까지 악몽 같은 10일을 보냈다.

조합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해서 파업에 참가했지만 지금은 조합이 없어도 될 것 같다.

선량한 조합원들은 빨리 돌아와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

여수=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