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이기태(李基泰ㆍ56) 사장은 투박하고 거침없는 화술을 구사한다.

거두절미에 단도직입적인 스타일이다.

상대방의 논리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더 믿는 경향도 있다.

당연히 고집스러워 보인다.

이 때문에 초급 임원시절엔 "제 멋대로이고 안하무인"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지난 92년 임원이 돼 시작한 골프(현재 핸디캡은 14)도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골프 클럽을 한번도 잡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첫 라운딩을 했다.

전날 '골프 에티켓' 관련 책을 한권 구해 읽었을 뿐이다.

동반자들이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후로도 연습장엔 간 적이 없다.

"아니, 축구 시작할 때 연습장에 따로 가서 배웁니까. 그냥 차면 되는거죠…."

섬세한 디자인과 감성,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앞세워 애니콜을 세계 톱 브랜드로 키운 주인공치고는 의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대전 보문고 시절 이 사장의 별명은 '깜박이 없는 불도저'였다.

그야말로 좌충우돌이라는 얘기였다.

축구의 거친 몸싸움을 좋아했고 동네 '주먹'들과 '맞짱'을 뜰 정도로 배짱도 두둑했다.

한여름이면 통반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죽어라고 공만 찼다.

그래도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3형제 중 막내로 자란 그의 가정은 윤택하지 못했다.

등록금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돈벌이에 골몰하던 날이 많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67년 인하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장래 희망은 여전히 사업가였고 축구도 계속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통신학교의 교관(학군장교 9기)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명교관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이어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이 73년 7월.

당시 입사동기생들이 삼성화재 이수창 사장과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이상대 사장이다.

원래 장사를 하려고 했지만 당장 돈이 급했던 탓에 삼성에 들어갔다.

73년 결혼했지만 전세 얻을 돈도 없었다.

일단 3∼4년 정도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일도 배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사업가를 꿈꾸었다면서 어떻게 30년이나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 사장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았다"며 계면쩍게 웃었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는 "나의 모든 것은 높이 계신 분(하느님)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삼성전자 내에서 라디오과-음향1과-음향품질관리실-비디오 생산부를 거치며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다.

일단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봤다.

빠른 일처리와 확실한 마무리로 인정도 받았다.

물론 평탄한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대한민국의 현직 CEO중 가장 많이 사표를 냈던 사람일 것이다.

과장-차장-부장 때 수시로 사표를 던졌다.

자신이 하는 일에 조직이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생각되면 미련없이 결행했다.

85년 비디오 사업부장을 할 때는 강원도로 도망가 20여일이나 버틴 적도 있었다.

직속 상사는 성질이 불 같았던 윤종용 부회장(당시 이사).

예나 지금이나 이 사장은 윤 부회장을 어려워한다.

폭탄주를 무척 싫어하는 그이지만 윤 부회장이 주는 잔은 받아 마신다.

그런 윤 부회장도 야생마 같은 이 사장을 어쩌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2001년 사장이 된 이후에도 사표를 낸 적이 있다.

당시 이 사장은 정보통신 사업부 소속이 아닌 본사 총괄사업부의 마케팅 부장 A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임원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문제는 이 사장에게 인사권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본사 인사팀에 발탁 요청을 했다.

하지만 인사팀은 규정상 아직 승진 대상이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관리의 삼성'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사장은 그 길로 사표를 던지고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임원 한 사람도 내 마음대로 승진시키지 못하는 사장직은 맡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이 얘기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 회장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팀은 A씨를 임원으로 승진시켰고 이 사장도 업무에 복귀했다.

이 사장의 밀어붙이기식 일처리와 고집 때문에 상사들도 곤욕을 치렀지만 이 사장 자신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장생활 최대의 스트레스로 주저없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꼽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었습니다. '지금 저 사람들이 나의 영원한 상사나 부하가 아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고."

사실 과거 삼성의 상명하복식 의사결정 구조나 관료화된 조직체계는 분명 그의 체질과 맞지 않았다.

논리와 차분함이 득세를 하던 시절 직관적이고 다혈질적인 성향은 필연적으로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91년 9월 마침내 이사보가 됐으나 아직 그의 무대는 열리지 않았다.

수백명의 임원 중 한사람일 뿐이었다.

다시 몇해가 흘러 94년 1월 무선사업(DATA)부문 이사로 발령이 났다.

사람들은 '이기태가 물 먹었다'고 수군거렸다.

사실 무선통신은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홀대받고 있었다.

매출은 빈약했고 장래성도 없어 보였다.

이 사장에겐 이것이 기회였다.

그는 특유의 저돌적인 스타일로 스스로 사업을 꾸리고 확장해 나갔다.

윗선에서도 이 사장에게 많은 재량과 권한을 주었다.

한번 알아서 해보라는 분위기였다.

애니콜 10년 신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볍고 튼튼하고 성능과 디자인이 좋은, 그야말로 완벽한 휴대폰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지상과제였다.

'깜박이 없는 불도저의 돌진'은 93년 이건희 회장이 선포했던 신경영의 정신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95년 이 회장은 무선전화기 품질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듣고 시중에 나가있는 모든 제품들을 수거해 불태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95년 3월9일 구미사업장에서는 5백억여원 상당의 무선 전화기 15만대가 검붉은 연기를 뿜어내며 잿더미로 변했다.

"그때 과감하게 버리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애니콜은 없었을 것입니다. 전화기를 휘어감은 불길 속에서 우리 모두는 미래 희망의 불씨를 보았습니다."

96년 상무로 승진한 이후 그는 무선사업부장을 맡았다.

전무-부사장-사장으로 승진한 지금까지 사업부장직은 그의 명함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95년 1백만대에서 출발해 올해 8천6백만대(목표)를 판매하기까지 그는 지난 10년 동안 외형을 86배나 키웠다.

한국 수출품으론 드물게 고가에 팔리는 애니콜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는 30억달러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화려한 외양의 껍질을 들춰보면 여전히 부족함과 아쉬움투성이란다.

그는 부하직원들에게도 불만이 많다.

"평생직장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저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왜 직장을 자신의 평생 일터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잘리고 나면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것이 월급쟁이의 운명입니다.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돈(월급)은 회사가 주지만 꿈은 아무도 주지 않습니다."

이 사장은 지난해 11월 서울 한남동 이건희 회장의 자택에서 가진 사장단 모임에서 미래 사업방향을 브리핑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와 데이터를 인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특유의 직관과 자신감을 표출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브리핑이 끝나고 난 뒤 "이제 휴대폰은 나보다 이 사장이 낫네"라는 이 회장의 총평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삼성그룹의 현직 CEO 중에 이 회장으로부터 이 정도의 칭찬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