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院산책] (4)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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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야(蘭若)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입니다.참선수행을 위하여 출입을 금지합니다."
설법전 아래 돌계단을 내려와 동화사 계곡 위의 해탈교를 건너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자 오른편에 이런 표지판이 길을 막는다.
난야(蘭若)란 인도어 "아란야(Aranya)"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적정처(寂靜處),즉 "고요한 곳"이라는 뜻.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가다 편액도 없는 일각문을 지나자 금당선원이 눈에 들어온다.
선원으로 들어서니 선방과 요사채,극락전과 그 좌우의 동.서탑,수마제전 등이 정적에 쌓여있다.
입선(入禪)중인 수좌들의 선기(禪氣)가 전해오는 듯하다.
금당선원 자리는 원래 금당암이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진표 율사로부터 팔간자를 전해받은 심지(心地) 왕사가 이를 팔공산에 던져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곳이 바로 금당선원 자리다.
금당선원은 한국 불교의 선맥을 잇는 도량으로 수많은 도인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에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성철 스님이 29세 때인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無(무)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던 곳도 금당선원이다.
올해 하안거에는 24명이 정진 중이다.
난야의 고요함을 깰까 두려워 선방과 수마제전은 먼 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설법전으로 향한다.
설법전 아래층의 전국선원수좌회 사무실에서 선원장 지환(智幻·58)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지환 스님은 다음달 초 동화사에서 열리는 담선대법회 때 발표할 원고를 쓰느라 한창이다.
"담선대법회에서 까다로운 주제(현재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를 맡아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
지금 한국 선불교의 큰 문제는 참선 공부를 이끌어줘야 할 조실과 방장이 제 역할을 못해서 선불교가 형식화되는 데 있어요.
(축구의 히딩크 감독과 마라톤의 고(故) 정봉수 감독을 예로 들며) 스포츠에서 감독이 중요한 것처럼 깨달음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지도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선방에서 수행하는 납자는 많지만 이들을 바로 이끌어줄 선지식이 드물다는 얘기다.
지환 스님은 요즘 선방에 대해 "감독 없이 멋대로 공차는 선수들 같다"고 한다.
뼈를 깎는 일대 혁신 없이는 선조의 업적을 후광으로 사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렬한 자성도 보탰다.
"선이란 불교의 근본사상인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체험적으로 꽃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연기적 삶,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을 살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행(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선에서는 깨닫는 과정은 물론 깨달은 후의 모습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환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불교의 근본 입장,즉 불교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인격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것.
이런 전제 없이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는 '화두 만능주의'로는 간화선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깨달았다고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체(體)는 같으나 깨달은 후의 행위인 용(用)은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깨닫기 전에 준비된 것이 튼튼하지 않으면 깨달은 후의 용(用),즉 사회적 기여나 실천이 미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바탕에 대비원력의 삶과 자비심이 깔려 있어야 깨달은 후에 묘용(妙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화두를 들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는 깨치기도 어렵고 설령 깨친다 해도 초견성(初見性)과 확철대오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설프게 되기 십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저도 20대 때 한소식 했다고 큰소리치고 다닌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서른 서너살 무렵 봉암사에서 산철 결제(안거 기간 외의 결제)를 할 때 분발심이 나서 용맹정진을 한 끝에 뭔가 변화가 있어서 성철 스님한테 갔더니 '야 인마,멀었다 멀었어'라며 퇴짜를 놓으셨어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기 전에는 공부 그만둘 생각 마라'던 성철 스님의 말씀을 등불삼아 아직도 정진 중입니다."
고교 때 불교에 입문해 성철 광덕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인연이 닿아 출가한 지환 스님은 해인사 백양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해 왔고 쌍계사 금당선원장을 거쳐 2002년부터 동화사 금당선원장을 맡고 있다.
문답을 마치고 일어서는 선사의 바짓가랑이가 낡아 해져서 살이 한뼘이나 드러나 보였다.
대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설법전 아래 돌계단을 내려와 동화사 계곡 위의 해탈교를 건너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자 오른편에 이런 표지판이 길을 막는다.
난야(蘭若)란 인도어 "아란야(Aranya)"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적정처(寂靜處),즉 "고요한 곳"이라는 뜻.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가다 편액도 없는 일각문을 지나자 금당선원이 눈에 들어온다.
선원으로 들어서니 선방과 요사채,극락전과 그 좌우의 동.서탑,수마제전 등이 정적에 쌓여있다.
입선(入禪)중인 수좌들의 선기(禪氣)가 전해오는 듯하다.
금당선원 자리는 원래 금당암이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진표 율사로부터 팔간자를 전해받은 심지(心地) 왕사가 이를 팔공산에 던져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곳이 바로 금당선원 자리다.
금당선원은 한국 불교의 선맥을 잇는 도량으로 수많은 도인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에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성철 스님이 29세 때인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無(무)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던 곳도 금당선원이다.
올해 하안거에는 24명이 정진 중이다.
난야의 고요함을 깰까 두려워 선방과 수마제전은 먼 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설법전으로 향한다.
설법전 아래층의 전국선원수좌회 사무실에서 선원장 지환(智幻·58)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지환 스님은 다음달 초 동화사에서 열리는 담선대법회 때 발표할 원고를 쓰느라 한창이다.
"담선대법회에서 까다로운 주제(현재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를 맡아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
지금 한국 선불교의 큰 문제는 참선 공부를 이끌어줘야 할 조실과 방장이 제 역할을 못해서 선불교가 형식화되는 데 있어요.
(축구의 히딩크 감독과 마라톤의 고(故) 정봉수 감독을 예로 들며) 스포츠에서 감독이 중요한 것처럼 깨달음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지도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선방에서 수행하는 납자는 많지만 이들을 바로 이끌어줄 선지식이 드물다는 얘기다.
지환 스님은 요즘 선방에 대해 "감독 없이 멋대로 공차는 선수들 같다"고 한다.
뼈를 깎는 일대 혁신 없이는 선조의 업적을 후광으로 사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렬한 자성도 보탰다.
"선이란 불교의 근본사상인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체험적으로 꽃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연기적 삶,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을 살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행(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선에서는 깨닫는 과정은 물론 깨달은 후의 모습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환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불교의 근본 입장,즉 불교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인격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것.
이런 전제 없이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는 '화두 만능주의'로는 간화선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깨달았다고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체(體)는 같으나 깨달은 후의 행위인 용(用)은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깨닫기 전에 준비된 것이 튼튼하지 않으면 깨달은 후의 용(用),즉 사회적 기여나 실천이 미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바탕에 대비원력의 삶과 자비심이 깔려 있어야 깨달은 후에 묘용(妙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화두를 들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는 깨치기도 어렵고 설령 깨친다 해도 초견성(初見性)과 확철대오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설프게 되기 십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저도 20대 때 한소식 했다고 큰소리치고 다닌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서른 서너살 무렵 봉암사에서 산철 결제(안거 기간 외의 결제)를 할 때 분발심이 나서 용맹정진을 한 끝에 뭔가 변화가 있어서 성철 스님한테 갔더니 '야 인마,멀었다 멀었어'라며 퇴짜를 놓으셨어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기 전에는 공부 그만둘 생각 마라'던 성철 스님의 말씀을 등불삼아 아직도 정진 중입니다."
고교 때 불교에 입문해 성철 광덕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인연이 닿아 출가한 지환 스님은 해인사 백양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해 왔고 쌍계사 금당선원장을 거쳐 2002년부터 동화사 금당선원장을 맡고 있다.
문답을 마치고 일어서는 선사의 바짓가랑이가 낡아 해져서 살이 한뼘이나 드러나 보였다.
대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