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5) 유관홍 현대중공업 사장‥침체사업 흑자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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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홍 현대중공업 사장(59)이 현대미포조선 CEO로 있던 2002년 10월,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매제인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84)이 그를 불렀다.
"야 유 사장! 너 집 안사나?"
"회장님 제게 무슨 집이 필요합니까? 그냥 사택에서 살면 되지요"(직장 생활한지 30년이 됐지만 그 때까지 유 사장은 내집을 장만하지 않고 사택을 고집했다)
"그래도 그렇지 않지. 자네도 이제 환갑을 앞두고 있잖아. 직원들 눈도 있고 내가 돈 좀 빌려줄까."
"아이고 됐십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영주 명예회장의 강권에 밀려 조선소 인근에 텃밭을 끼고 있는 대지 2백평짜리 단층 주택을 마련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내집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유 사장은 지금까지 울산의 번화가로 통하는 남목 고개를 단 한번도 넘어간 적이 없다.
1973년 입사 이후 사택과 현장을 오가는 생활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했다.
새벽에 출근해 밤 늦게 퇴근했던 그에게 최적의 주거는 사택이었다.
신시가지에 시설 좋은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도 그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유 사장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3대째를 내리 살아온 동네였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걸어서 다녔다.
어릴 땐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모친이 자주 편찮아 병원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다지 심각한 결심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마땅히 떠오른 것도 없고 남들이 좋다고 해서 그랬던 거지…."
하지만 그는 63년 겨울 서울대 의대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를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냥 후기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고 성균관대 화학과에 지원했다.
의사를 못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시절만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낭만 가득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평일엔 학교 근처에서 술 마시고 주말엔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을 다녔다.
공부는 적당히 했다.
대신 글을 많이 썼다.
특히 시와 수필 쓰기를 즐겼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월간 상아'라는 잡지사를 차려 사장이 됐다.
일종의 교양잡지였다.
글쓰기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마음껏 글을 썼다.
당시의 주요 필진은 최승호 현 주이집트 대사, 이동진 전 외교부 본부대사 등.
이동진씨는 69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기도 했다.
잡지사는 1년도 못가 망했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 만드는 비상업적인 잡지가 될 턱이 없었다.
7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하는 수 없이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웨스팅하우스 같은 해외 업체들이 핵심 기술이나 부품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욕 없이 슬렁슬렁 다니다보니 곧 싫증이 났다.
2년만에 그만두고 73년5월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전 직장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바다가 있었고 휘영청 불을 밝힌 채 물 위에 떠있는 거대한 선박들이 좋았다.
"내가 인생을 바칠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었어요. 검은 바다에 일렁이던 크레인과 중장비들의 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무수한 별빛들도 생생하고요."
유 사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술에 취해 문학과 인생을 논하고 낭만을 얘기하던 과거의 그는 조선소의 깊은 밤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품질관리를 맡은 엔지니어였다.
매일 오전 5시에 출근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하루종일 넓은 야드를 헤집고 다니며 전체 공정을 다 지켜봤다.
퇴근 시간을 넘겨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사택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현장에 나갔다.
"무슨 큰 야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저 원하는 직장을 찾았으니 최선을 다해보려고 마음 먹었던 거지요."
부인(최순자ㆍ52)이 바가지를 긁지 않더냐는 질문에는 "전혀요. 제가 아침을 안 먹고 다녔거든요. 그만하면 편하게 해준 것 아닙니까"라며 웃어넘겼다.
진급에 큰 욕심은 내지 않았지만 76년 과장, 78년 차장, 83년 부장으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했다고 한다.
자신의 현업이나 소속 부서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오지랖이 넓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현장을 돌았던 덕분에 근로자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84년 생산부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미국의 선사 MOC사에 탱크선 인도를 앞두고 진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주 측에서 선박 밑바닥에 물때가 많이 끼었다며 진수 전에 때를 다 지워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진수 예정날짜는 그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유 사장은 일요일 아침에 자신의 '비상연락망'을 가동했다.
과거 품질관리부 소속 직원과 근로자 1백여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물때 제거 장비를 들고 전원이 매달린 끝에 해가 질 때쯤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했다.
이 광경을 직접 본 MOC 측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도 현대중공업에만 발주를 하고 있다.
그날 유 사장은 직원들에게 거나하게 술을 한잔 샀다.
수십박스의 막걸리를 야드에 반입해 실컷 마시고 떠들었다.
1백여명의 직원과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며 다 한잔씩 받아 마셨다.
"제 주량요? 글쎄 저도 아직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필름'이 끊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소주 10병 정도는 거뜬합니다."
물론 매일 새벽 출근을 하는 유 사장이 과음을 하는 날은 많지 않다.
하지만 경계선이 없는 활동반경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회사내 신망은 더욱 두터워졌다.
"아마 당시 인기투표로 사장을 뽑았더라면 제가 당선됐을 겁니다."
87년 당시 이춘림 사장은 유 사장을 신규 임원으로 선임하면서 "현장의 품질관리는 당신이 최고"라는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관계가 좋아도 80년대 말 폭풍처럼 불어닥친 노사분규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89년에 1백29일 전면 파업에 이어 90년엔 자신이 생산을 총괄하고 있는 4,5도크 주도로 골리앗 파업이 벌어졌다.
현장의 문제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근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스킨십을 시도했다.
파업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근로자들에게도 부지런히 면회를 다녔다.
피의자 면회실을 이용하지 않고 검찰에 부탁해 검사실에서 따로 만났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면회를 마치고 나올 때는 담당 검사를 만나 "나를 믿고 무조건 풀어달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부탁했다.
4,5도크 근로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 사장을 신뢰하고 따랐다.
94년 상무에 이어 98년 생산 1야드를 총괄하는 전무로 승진했다.
99년엔 IMF 사태의 여파로 침체에 빠진 건설장비 사업본부장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키면서 국내 1위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기 위해 좋아하던 골프도 3년동안 끊었다.
2002년엔 현대미포조선 사장으로 날아가 당시 수리사업에서 신조선사업으로 갓 전환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지난 6월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유 사장을 '기업회생 전문가'라는 뜻의 '턴어라운드 아티스트(Turn-around Artist)'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전문인은 단시일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학 전공이나 근무 부서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저는 화학과를 나왔지만 감히 대한민국 최고의 조선 전문가라고 자부합니다. 사실 대학교육이 현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문제지요. 길게 보고 가면 누구든 장인(匠人)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이 때문에 '질량 불변의 법칙'은 자연과학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인간의 의지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울산=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야 유 사장! 너 집 안사나?"
"회장님 제게 무슨 집이 필요합니까? 그냥 사택에서 살면 되지요"(직장 생활한지 30년이 됐지만 그 때까지 유 사장은 내집을 장만하지 않고 사택을 고집했다)
"그래도 그렇지 않지. 자네도 이제 환갑을 앞두고 있잖아. 직원들 눈도 있고 내가 돈 좀 빌려줄까."
"아이고 됐십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영주 명예회장의 강권에 밀려 조선소 인근에 텃밭을 끼고 있는 대지 2백평짜리 단층 주택을 마련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내집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유 사장은 지금까지 울산의 번화가로 통하는 남목 고개를 단 한번도 넘어간 적이 없다.
1973년 입사 이후 사택과 현장을 오가는 생활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했다.
새벽에 출근해 밤 늦게 퇴근했던 그에게 최적의 주거는 사택이었다.
신시가지에 시설 좋은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도 그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유 사장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3대째를 내리 살아온 동네였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걸어서 다녔다.
어릴 땐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모친이 자주 편찮아 병원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다지 심각한 결심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마땅히 떠오른 것도 없고 남들이 좋다고 해서 그랬던 거지…."
하지만 그는 63년 겨울 서울대 의대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를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냥 후기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고 성균관대 화학과에 지원했다.
의사를 못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시절만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낭만 가득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평일엔 학교 근처에서 술 마시고 주말엔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을 다녔다.
공부는 적당히 했다.
대신 글을 많이 썼다.
특히 시와 수필 쓰기를 즐겼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월간 상아'라는 잡지사를 차려 사장이 됐다.
일종의 교양잡지였다.
글쓰기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마음껏 글을 썼다.
당시의 주요 필진은 최승호 현 주이집트 대사, 이동진 전 외교부 본부대사 등.
이동진씨는 69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기도 했다.
잡지사는 1년도 못가 망했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 만드는 비상업적인 잡지가 될 턱이 없었다.
7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하는 수 없이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웨스팅하우스 같은 해외 업체들이 핵심 기술이나 부품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욕 없이 슬렁슬렁 다니다보니 곧 싫증이 났다.
2년만에 그만두고 73년5월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전 직장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바다가 있었고 휘영청 불을 밝힌 채 물 위에 떠있는 거대한 선박들이 좋았다.
"내가 인생을 바칠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었어요. 검은 바다에 일렁이던 크레인과 중장비들의 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무수한 별빛들도 생생하고요."
유 사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술에 취해 문학과 인생을 논하고 낭만을 얘기하던 과거의 그는 조선소의 깊은 밤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품질관리를 맡은 엔지니어였다.
매일 오전 5시에 출근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하루종일 넓은 야드를 헤집고 다니며 전체 공정을 다 지켜봤다.
퇴근 시간을 넘겨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사택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현장에 나갔다.
"무슨 큰 야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저 원하는 직장을 찾았으니 최선을 다해보려고 마음 먹었던 거지요."
부인(최순자ㆍ52)이 바가지를 긁지 않더냐는 질문에는 "전혀요. 제가 아침을 안 먹고 다녔거든요. 그만하면 편하게 해준 것 아닙니까"라며 웃어넘겼다.
진급에 큰 욕심은 내지 않았지만 76년 과장, 78년 차장, 83년 부장으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했다고 한다.
자신의 현업이나 소속 부서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오지랖이 넓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현장을 돌았던 덕분에 근로자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84년 생산부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미국의 선사 MOC사에 탱크선 인도를 앞두고 진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주 측에서 선박 밑바닥에 물때가 많이 끼었다며 진수 전에 때를 다 지워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진수 예정날짜는 그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유 사장은 일요일 아침에 자신의 '비상연락망'을 가동했다.
과거 품질관리부 소속 직원과 근로자 1백여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물때 제거 장비를 들고 전원이 매달린 끝에 해가 질 때쯤 작업을 마치는데 성공했다.
이 광경을 직접 본 MOC 측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도 현대중공업에만 발주를 하고 있다.
그날 유 사장은 직원들에게 거나하게 술을 한잔 샀다.
수십박스의 막걸리를 야드에 반입해 실컷 마시고 떠들었다.
1백여명의 직원과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며 다 한잔씩 받아 마셨다.
"제 주량요? 글쎄 저도 아직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필름'이 끊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소주 10병 정도는 거뜬합니다."
물론 매일 새벽 출근을 하는 유 사장이 과음을 하는 날은 많지 않다.
하지만 경계선이 없는 활동반경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회사내 신망은 더욱 두터워졌다.
"아마 당시 인기투표로 사장을 뽑았더라면 제가 당선됐을 겁니다."
87년 당시 이춘림 사장은 유 사장을 신규 임원으로 선임하면서 "현장의 품질관리는 당신이 최고"라는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관계가 좋아도 80년대 말 폭풍처럼 불어닥친 노사분규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89년에 1백29일 전면 파업에 이어 90년엔 자신이 생산을 총괄하고 있는 4,5도크 주도로 골리앗 파업이 벌어졌다.
현장의 문제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근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스킨십을 시도했다.
파업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근로자들에게도 부지런히 면회를 다녔다.
피의자 면회실을 이용하지 않고 검찰에 부탁해 검사실에서 따로 만났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면회를 마치고 나올 때는 담당 검사를 만나 "나를 믿고 무조건 풀어달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부탁했다.
4,5도크 근로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 사장을 신뢰하고 따랐다.
94년 상무에 이어 98년 생산 1야드를 총괄하는 전무로 승진했다.
99년엔 IMF 사태의 여파로 침체에 빠진 건설장비 사업본부장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키면서 국내 1위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기 위해 좋아하던 골프도 3년동안 끊었다.
2002년엔 현대미포조선 사장으로 날아가 당시 수리사업에서 신조선사업으로 갓 전환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지난 6월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유 사장을 '기업회생 전문가'라는 뜻의 '턴어라운드 아티스트(Turn-around Artist)'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전문인은 단시일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학 전공이나 근무 부서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저는 화학과를 나왔지만 감히 대한민국 최고의 조선 전문가라고 자부합니다. 사실 대학교육이 현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문제지요. 길게 보고 가면 누구든 장인(匠人)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이 때문에 '질량 불변의 법칙'은 자연과학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인간의 의지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울산=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