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ㆍ여당이 재정 확대 카드를 꺼내든 가운데 한국은행은 12일 콜금리 전격 인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범정부 차원에서 재정ㆍ통화 등 거시정책을 총동원, 경기 부양에 '올인'하는 쪽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그동안 단기 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정부나 물가불안에 발목이 잡혔던 한은의 이같은 변신은 그만큼 불황이 심각함을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내수 침체가 돈을 쏟아붓는다고 되살아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다.

오히려 초(超)저금리가 4백조원으로 추산되는 시중 부동자금의 단기 부동화만 부채질해 '머니게임'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당장 이날 채권시장은 예기치 못한 콜금리 인하로 국고채 금리가 사상 최저치로 급락하는 등 충격에 휩싸였다.

은행 보험 연기금 등 기관들은 초저금리 속에 돈을 어디에 굴려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다.

◆ 부동자금 단기부동화 가속화 우려

금융계 관계자들은 이번 콜금리 인하로 인해 시중자금의 단기 부동화 현상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높은 금리를 주면 금방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설 자금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은행ㆍ투신ㆍ종금사를 떠돌아 다니는 단기 부동자금 규모는 지난 2001년 말 3백38조5천억원에서 2002년 말 3백70조1천억원, 2003년 말 3백81조3천억원, 올 6월 말 3백88조8천억원 등으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은행권의 자금 이탈 추세에도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현재 은행의 정기적금 금리는 3%대로 떨어져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실질금리가 이미 마이너스권에 진입한 상태다.

예금을 할수록 오히려 손해가 나는 구조다.

실제로 지난달 금융권별 수신 추이를 보면 은행계정에서는 6조5천억원이 빠져 나간 반면 투신권에는 6조8천3백45억원이 새로 유입됐다.

시중은행 관계자는"국내 금리에 만족하지 못한 자금의 해외 이탈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 채권시장 불붙은 머니게임

콜금리 인하는 가뜩이나 달아올라 있는 채권시장의 '머니 게임'에 기름을 쏟아부은 격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이날 개장 초 연 4.0%로 출발했던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오전 11시50분께 콜금리 전격 인하 소식이 전해지자 단번에 전날보다 0.17%포인트 수직 급락한 연 3.87%로 내려갔다.

"물가 대신 경기를 선택했다"는 박승 한은 총재의 발언이 전해지면서 그동안 국고채 금리가 너무 낮다(채권값이 비싸다)며 관망했던 세력까지 '사자' 대열에 가세했다.

콜금리 인하가 워낙 급작스러웠던 탓에 "일단 사놓고 보자"는 심리로 채권 단기물과 장기물 가릴 것 없이 금리 하락폭이 0.17∼0.19%포인트로 엇비슷해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통상 콜금리 인하가 예견된다면 단기채권 금리부터 내려가고 장기채권이 따라가는 것이 정상이다.

결국 콜금리 인하는 오갈데 없던 시중 부동자금의 물꼬를 채권시장으로 터준 격이 됐다.

외국계 은행 채권딜러는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금리마저 내리면 돈을 그냥 갖고만 있으면 손해가 난다"며 "그렇다고 주식시장으로 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어서 당분간 시중자금은 채권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예금금리 0.2%포인트 인하될 듯

은행들은 콜금리가 낮아진 만큼 예금금리도 비슷한 비율로 내린다는 방침이다.

금리 인하 폭은 1년만기 정기예금 기준으로 0.2%포인트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콜금리 인하폭인 0.25%포인트 이상을 내리면 가뜩이나 저금리로 불만이 많은 고객들이 대거 빠져 나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지난달부터 은행권 고객이 머니마켓펀드(MMF)나 실적배당 상품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금리를 더 내리면 고객 이탈이 가속화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설명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에 중요한 것은 콜금리보다 시장금리 동향"이라며 "시장금리가 콜금리 인하폭보다 더 떨어지면 예금금리를 추가로 내려야 할 것이고,반대 상황이면 소폭만 조정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형규ㆍ김인식ㆍ안재석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