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놓인 수십개의 좌복들 가운데 한 점으로 앉아있는 그 모습에선 미동(微動)도 찾을 수가 없다.
번뇌망상을 없애고 화두를 타파해 자성(自性)을 깨치려는 간절함만 있을 뿐...
비구니 참선도량 1번지로 꼽히는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 선원.지하 1층,지상 2층으로 지은 석조건물에 기와를 얹은 모양이라 밖에서 보면 여느 선원의 전통 목조건축물과 달리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견성암은 1900년대 초 수덕사 위쪽에 있는 정혜사 오른편 위의 두 칸 남짓한 토굴에서 시작한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다.
좁고 불편했지만 일찍부터 40∼50명의 선객들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덕숭 문중의 개조(開祖)이며 경허 스님에 이어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한 만공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후 견성암은 초가집 기와집으로 발전하며 수많은 납자들의 수행처로 각광받았다.
1916년 만공 스님으로부터 법(깨달음)을 인가받아 비구니 법맥을 중흥시킨 법희 스님(1887∼1975)을 비롯해 개화기의 여류시인 일엽 스님(1896∼1971),일타 스님의 누나인 응민 스님(1923∼84)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했다.
그래서 견성암에는 지금도 안거 때면 1백명 안팎의 선객들이 모여들 만큼 구도열이 높다.
올해 하안거에 견성암에서 정진 중인 스님은 모두 75명.새벽 3시 도량석에서부터 밤 9시 방선(放禪)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방일(放逸)할 틈이 없다.
"견성암은 역사가 깊을 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견성한 스님들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법희,일엽,응민,만성,수업 스님 등 손꼽기도 벅차지요. 젊은 스님들의 공부 열기도 대단합니다. 땀이 줄줄 흘러도 용맹정진하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을 보면 늙은 제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예요."
견성암 본당 옆에 새로 지은 동선당(東禪堂)에서 만난 이곳 선원장 성원(性圓·72) 스님은 이렇게 젊은 수좌들을 칭찬했다.
요즘 젊은 스님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위해 발심(發心)하는 경우가 많고 견성해야 한다는 일념도 대단하다는 설명이다.
"정혜사 뒤쪽 초가집에서 공부할 땐 만성,일엽 스님을 모셨어요. 일엽 스님은 늘 '정진하라,정진하라'고 경책하셨지요. 세인들은 일엽 스님을 화려한 연애담의 주인공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아요. 일엽 스님은 평생을 혹독하게 정진한 참 수행자였습니다. 알고 보면 그대로가 천진불(天眞佛)이었지요."
14세 때 견성암으로 출가한 성원 스님은 초가집 기와집 선원에서 공부할 땐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도시락으로 꽁보리밥을 싸서 홍성까지 30리 길을 걸어 장을 보고 돌아오면 다음날 새벽 3시가 되곤 했다.
견성암이 지난 65년 지금의 자리에 석조건물을 지어 이사한 것도 이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벽초 스님이 애를 쓴 덕분이라고 한다.
시설이야 옛날보다 편해졌다지만 참선정진하는 일이야 어디 쉬워졌을까.
"생사를 걸고 하는 일이라 피나는 어려움이 따르지요. 그 일이 쉽다면 머리 깎고 산중 생활을 해야 할 이유도 없겠지요.이 더운 날,선풍기도 없이,땀이 줄줄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정진하는 것은 성불하겠다는 일념 때문입니다."
노장은 "화두를 들고 세상 일을 마치면 대선지식보다 낫다"면서 "처사님도 한번 해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세상 속에 사는 사람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끊임없이 파고드는 망상과 잡념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원래 망상 속에서 태어났어요. 이 몸뚱이가 망상덩어리 아닙니까. 그러나 신심과 일념으로 공부하면 망상은 줄고 화두에 집중하게 돼요. 불법(佛法)을 알되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수박 껍질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일념으로 정진해야 수박의 빨간 속을 맛보게 되지요."
성원 스님은 "사람들이 뭔가 손에 지니고 쌓으려 하다 보니 그 욕심 때문에 마장(魔障)을 벗어나지 못한다"며 "버릴 땐 버리고 가질 땐 갖는 개차법(開遮法)을 염두에 두라"고 강조한다.
개차법이란 계율을 지킴에 있어 상황에 따라 열고 닫는 것.계율에 얽매여 더 큰 것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노장의 말씀은 역으로 불가피한 욕심은 내더라도 필요 이상의 욕심은 내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하산하는 길,일엽 스님이 살았던 견성암 아래 환희대(歡喜臺)의 원통보전 앞마당 정자에 걸린 쪽지에 적힌 선시(禪詩)가 마음을 끈다.
'本是無南北(본시무남북·본디 남북이 없는데) 何處有東西(하처유동서·동서가 어디 있을까) 天地本虛空(천지본허공·천지가 본래 허공이니) 白雲無定處(백운무정처·흰구름은 정처가 없도다).'
예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