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의 일이다.

삼성그룹 비서실 김순택 과장의 부인 김해숙씨(53)는 옆집 할머니로부터, 지금 생각해도 실소가 나오는 황당한 충고(?)를 들었다.

"새댁, 아직 나이도 젊고 배움도 있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야."

할머니는 "내가 나설 일은 아닌 줄 알지만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워 그런다"며 "앞날이 창창하니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부인은 이내 무슨 얘기인지 알아차렸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20여일이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부인이 이른바 '첩살이'를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이 집을 예사로 비우는데다 어쩌다 귀가하는 날도 한밤중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실제로 김순택(金淳澤ㆍ55) 삼성SDI 사장의 해묵은 수첩에는 그해 3백65일중 1백83일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김 사장은 서울 개포동 단독주택에 살았다.

밥 먹듯이 하는 야근과 출장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78년 9월2일 딸 태연씨(26)가 태어났지만 지방출장 때문에 한 달 동안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성장하는 어린 딸의 재롱에 즐거워하기는커녕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제대로 안아준 적도 없었다.

김 사장은 이 일로 평생을 두고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김 사장은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78년부터 96년까지 중간에 1년(93년엔 삼성SDI 기획관리 본부장으로 잠시 근무)을 제외하고 17년을 비서실에서 보냈다.

비서라는 사람들은 원래 말이 없다.

잘 웃지도 않는다.

어떨 땐 쌀쌀맞기까지 하다.

삼성 비서실 감사팀장이라면 어땠을까.

계열사엔 공포의 대상이다.

한번 떴다하면 웬만한 임원들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든다.

김 사장은 바로 그 감사팀장 출신이다.

옆에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감사 대상 임직원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차갑고 무정한 '검객(劍客)'이었다.

거래처로부터 와이셔츠 티켓 하나를 받았다는 이유로 옷을 벗은 직원도 있었다.

김 사장은 승부근성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프로는 실패가 없다'가 생활 원칙이다.

김 사장은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중-경북고-경북대학(경제학과)을 나왔다.

69년 입학 당시 기준으로 역대 경북대 입학생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

한 해 1백명씩 서울대를 보냈던 경북고에서 전교 50등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감안해 지방에 남았다.

대구 서야동에서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때였다.

당시 경북고를 수석으로 졸업해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던 박성호 산업은행 뉴욕지점장은 "학창시절 순택이와 나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며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똑똑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학입학 직후 심심풀이 삼아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1학년 때 덜컥 1차 시험에 붙고 말았다.

신입생 시절의 낭만을 즐기고 있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듬해 2차 시험에선 떨어지고 말았다.

공부라면 어지간히 자신있어 했던 그였기에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저의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무원은 저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생활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초장부터 고시공부에 뛰어든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지 못한데 대한…."

대학시절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경북대 인근 3공단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근로자들의 모습이었다.

산업입국(産業立國)의 기치 아래 섬유ㆍ염색공장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나는 생존을 위해 저렇게 처절하게 공부하고 있는가…스스로 자문해 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위해 청춘을 불태울 수 있다면 후회없는 한판의 인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72년 11월 구학서 신세계 사장, 고홍식 삼성아토피나 사장, 이용순 삼성정밀화학 사장 등과 함께 삼성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해 대구에 있던 제일합섬에 배치를 받았다.

첫눈에 똑똑하다고 느낀 본사 인사팀이 '찍어서' 경리부로 내려보냈다.

똑부러지게 일했다.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하나를 지시받으면 둘을 해냈다.

상사들은 싹싹하고 부지런한 그를 좋아했다.

78년 8월15일, 소병해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그를 감사팀 과장으로 지명했다.

기강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비서실이었지만 김 사장은 자신에게 더 엄격했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바를 정'자를 마음 속에 새겼다.

감사팀은 업무 성격상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조직이다.

그 때문에 원칙과 정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인정에 얽매이는 것은 금물이었다.

"감사팀의 판단은 룰을 만드는 작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갈수록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85년 12월 감사팀을 떠나 비서실 운영팀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운영팀은 계열사들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곳.

삼성이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던 반도체 사업의 투자-재무-총무 관련 사안을 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삼성의 구조적인 전환기에 김 사장도 몸을 싣게 됐다.

그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비서실에도 적막이 찾아오면 김 사장은 사무실에 남아 반도체사업 기획안을 수없이 만들고, 또 지웠다.

86년 이사가 되고 88년 상무가 됐다.

승진은 동기들보다 항상 빨랐다.

승진 조건이 갖춰진 첫 해에 단 한 번도 누락되지 않고 승진했다.

90년 경영지도팀장(감사팀장)이 되고 91년 이건희 회장을 수행하는 비서팀장이 됐다.

그는 핵심을 짚어내는 브리핑 능력이 탁월했다.

감사팀 생활을 통해 길러진 것이었다.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 중역들이 회장실에 들어와 20여분 동안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간 사안을 그는 단 2분 만에 핵심만 골라 설명할 수 있었다.

99년 삼성SDI의 대표이사(부사장)로 왔을 때 많은 직원들은 김 사장을 어려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했다.

'검객'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서슬 퍼랬던 '감사팀장'이 아니었다.

김 사장은 속정이 깊은 면모를 보였다.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그들의 부모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자녀들을 인재로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저와 회사가 키우겠습니다"라고 했다.

임원들에게도 '사람 귀한 줄 알아라'라고 강조했다.

사기진작과 동기부여를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들도 만들었다.

도전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김 사장의 인재 경영은 삼성SDI가 지난해 한국경제신문사와 엘테크경영연구소가 제정ㆍ시상하는 '한경레버링 훌륭한 일터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 사장은 비서실 생활에 대해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젊은 나이에 좁은 안목으로 판단한 때가 없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피력했다.

요즘 같으면 대범하게 넘어갈 수도, 또 시야를 넓혀 생각할 일도 많았는데 야박하게 처리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악바리처럼 일했고 프로처럼 살았다.

경상도 사투리로 '세상 만사는 언젠가 뽀록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부족한 노력을 임기응변이나 요령으로 한 순간은 메울 수 있어도 언젠가는 들통이 난다는 것.

그는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남이 이뤄놓은 결과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긴 여정의 한 단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악착 같이 일하고 매달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청춘의 가치입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