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 시인 >

아버지는 늘 말씀이 없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으셨다.

키도 1백65cm를 넘지않는 자그마한 체구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시집을 오셨는데 아버지가 키도 작은데다 양미간의 눈썹이 달라붙어 있어 하늘이 샛노래지셨다고 한다.

하도 기가 막혀 어머니는 처음 시집 와 밤마다 호롱불 밑에서 볼품없는 양미간을 가득 채운 아버지의 까만 눈썹을 족집게로 뽑아내셨다는데,이것은 우리 가족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이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마당을 쓸었다.

아침마다 마당에는 빗살무늬 토기처럼 싸리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깔끔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일을 하고 저녁이 돼 돌아오시면 창호지 앞에 앉아 발뒤꿈치 굳은살을 면도칼로 깎아내셨다.

그리고 창호지 한쪽에 오려붙인 작은 유리로 밖을 내다보셨다.

아버지는 그 유리를 '거울'이라고 부르곤 하셨는데,아버지에게 그 거울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었다.

그런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창호지의 유리로 바라보며 일제 때 북간도에 징용갔을 때 탄광촌에서 배운 일본 노래를 낮은 음성으로 부르고 계셨다.

그 노랫소리가 하도 구슬퍼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성장하면서 나는 아버지처럼 말이 없고 가족에 등한한 분도 없으시다고 생각했다.

나귀처럼 평생 일을 짊어지고 사셨으나 가족을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으셨고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혀 창호지의 유리만 보고 사셨다.

그런 아버지이지만,어린 시절 저녁 무렵에 들었던 아버지의 일본 노래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늦둥이라 지금은 호호 할아버지가 된 1919년생 우리 아버지.한번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들려주지 않았지만 저녁빛에 물드는 창호지를 바라보며 부르시던 일본노래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서글프게 축약하고 있었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내 아버지는 조상들에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자신도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은 없지만 농부로서의 삶을 곡진하게 사셨다.

시대와 상관없이 오로지 마당과 들판에서 사시기를 원했으나,일제 강점기에는 북간도에 징용을 나가 탄광촌의 막장으로까지 내몰리셨다.

이런 개인사로서 내 아버지와는 경우가 다르지만,요즘 우리나라 신문과 방송을 요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과거사 규명 문제에 아버지들의 과거 캐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내로라 하는 명문가의 자식들이 정치인이 되어 자기 정파의 이득을 위해 아버지를 백척간두에 내몰고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체 게바라의 빙산'에는 우리나라 정치판을 연상케 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등장한다.

도르프만은 피노체트 이후 칠레 정치의 뒤틀린 모습을 암울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이 책은 부모 세대에 의해 이뤄진 불가피한 정치적 상황이 제 2세대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에 나온 시원적 아버지에 대한 전설에 비유해 그려내고 있다.

한 원시부족의 마을에 모든 여자를 독차지하고 아들들에게는 성을 허락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식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아들들은 승리감과 여자를 갖게 되리라는 희망에 도취된 채 죽은 아버지의 살을 나눠먹고 그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의식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의 우스꽝스런 자화상 역시 이같은 전설과 다를게 있을까.나는 정치인들이 투명하게 친일파 규명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기 정파의 이득을 따지기 이전에, 가진 것 없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은 최선을 다해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버지 같은 민초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난 자기 아버지의 영웅담과 기득권과 끝없는 변명 대신 말없이 마당과 들판에서 살아오신 내 가난한 아버지의 일본노래에 가득한 회한을 그들도 한번쯤 느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