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자서전 '불확실한 세계'에서 클린턴 정부 2기 때 비서실장으로 옮기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고백했다.

역할과 힘을 생각하면 솔깃했지만 1주일 내내 24시간 일할 걸 생각하니 안되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곤 잘나가던 99년,뉴욕에 살던 아내 주디와 합치겠다며 장관직을 사임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동서양 모두 쉽지 않은 듯하지만 국내에선 특히 어렵다.

아내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남편을 성공시키려면 퇴근시간을 챙기지 말라"고 조언한(?) 곳이 있었다고 하거니와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평가의 상당수는 '지독한 일벌레로 집에선 내놓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설 '아버지'(김정현)의 빅히트도 불철주야 회사 일에 매달리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왕따 당하는 수많은 아버지들의 처지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정한 자리에 오른 사람에겐 흔히 '두주불사'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접대 없이 영업 없다'거나 폭탄주 실력이 폭넓은 대인관계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데 따른 현상이다.

오죽하면 노동부에서 업무상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간질환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주기로 했을까.

세상은 그러나 어디선가 바뀌게 마련.우리은행이 매주 수요일을 '금주의 날'로 정해 단체회식을 없앤 데 이어,신한은행은 아예 수요일을 '야근·회식·회의' 세 가지가 없는 '3무(無)데이'로 만들고,삼성화재 또한 화·목요일을 회식 없이 곧장 퇴근,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화목의 날'로 지정했다는 소식이다.

1주일에 하루 이틀만이라도 '회사 밖의 시간외 근무'에서 벗어나도록 조치한 것이다.

'직원 만족이 있어야 고객 만족도 있고 생산성도 높아진다'는,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 새로운 기업문화인 셈.삼성화재의 경우 대신 오전 9시30분부터 2시간 동안은 괜한 회의나 흡연을 위한 자리 이동을 삼가는 골든타임제를 운영한다고 한다.

'3무 데이'나 '화목의 날'은 '출세하려면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통상적 사고가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음주 위주의 회식 및 접대만능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지켜지기가 쉽진 않겠지만.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