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1) 이상운 (주)효성 사장 ‥ 장사에 매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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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李相雲ㆍ52) 효성 사장은 천부적인 장사꾼이다.
젊은 시절 그는 커다란 이민백에 샘플들을 쑤셔넣고 겁없이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효성의 새파란 신입사원에게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집에까지 찾아왔던 얘기는 지금도 섬유업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섬유수출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며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라선 그이지만 당초의 꿈은 기업인이 아니라 대학교수였다.
경기고(66회ㆍ70년 졸업)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이 사장은 전형적인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고(故) 이종우 전 고려대 총장이 할아버지다.
부친 이동수씨(81)는 현재 동아꿈나무 재단 이사장이고 별세하신 모친 박화서씨도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 사장 자신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강단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75년8월 경기도 동두천의 한 군부대에서 현역복무를 마친 뒤 본격적인 유학 준비에 들어갔다.
76년11월 효성물산에 입사한 것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잠깐 사회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
우연찮게 학교에 들러 효성물산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그해 9월 말 교수 추천을 통해 입사하게 된 것.
"처음엔 효성물산이 종합상사인 줄도, 나일론이라는 제품을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저 전공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처음 맡은 일은 직물(원사)수출.
연구소를 지망했지만 회사는 그를 영업부에 배치했다.
화섬 면방 면직물을 취급하며 신용장 개설과 같은 무역실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영업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신의 실적을 쳐다보며 신기해 하기도 했다.
"제가 영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어요."
처음엔 텔렉스나 편지를 통해 영업을 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아예 출장을 나갔다.
주로 중동지역이다.
그는 쿠웨이트의 '알부자'들이 모여 있는 포목상들을 집중 공략했다.
영업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무더운 낮에는 포목점들이 영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업은 선이 굵은 스타일이었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이었다.
현지 시장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이 사장의 물건을 받아 돈을 번 상인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현지 신뢰도 높아지자 효성물산의 '주가'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는 여전히 신입사원이었지만 중소기업 사장들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기다려 서로 샘플을 보여주려고 아우성이었다.
젊은 나이에 우쭐한 기분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 유학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영업하는 재미에 빠져 차일피일 유학을 미루다보니 어느새 3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섬유공학보다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결국 79년 여름에 사표를 냈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원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자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영업담당 임원은 이 사장을 붙들기 위해 호주 시드니의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평사원에겐 특별한 혜택이었다.
유학을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그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참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면 기업과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회사에 남자니 어릴적 꿈을 포기해야 하고…."
하지만 비즈니스는 현실에 있었고 학자의 길은 막연하고 먼 미래였다.
어려운 영업을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한 기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삼성전자를 다니고 있던 친형 이상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54)도 효성 잔류를 권유했다.
그는 시드니행을 결정했다.
되돌리기 어려운 인생 최대의 승부처였다.
4년간의 시드니 생활을 마치고 83년 귀국했다.
직물수출 과장이라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로는 효성물산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 사장은 목표를 세웠다.
당시 연간 3천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 규모를 5년내 1억달러로 늘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선 수출대행 비중을 대폭 낮춰 직수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이나 홍콩에 현지 딜러를 두고 효성 브랜드로 직접 영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할 경우 폴리에스터 직물 쿼터와 나일론 직물 쿼터도 과감하게 사들였다.
이 사장은 당초 목표보다 2년 앞당긴 86년에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88년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1인 지점장으로 나갔다.
이미 다른 종합상사들이 진출해 있었지만 이 사장은 그 곳에서도 항상 1등이었다.
가족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나갔던 그는 효성외의 다른 기업들 제품까지 갖다파는 왕성한 영업력으로 1년에 3천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91년 귀국해 봉제무역부장을 거친 뒤 93년 영업 출신으론 처음으로 기획부장이 됐다.
"당시 기획부장은 관리 출신들로 계속 채워졌으나 현장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가 맡게 됐습니다. 영업을 떠나 회사 전반의 경영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지요."
94년 임원이 된 후에 기획실-시장개척실-사업개발실 등을 복수로 맡으며 나름대로 경영감각을 익혀나갔다.
종합상사는 점점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확장일로의 영업은 방대한 해외네트워크를 남겼지만 수익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97년 IMF 사태가 터지자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각됐다.
효성그룹은 98년 효성T&C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물산 등의 4개사를 통합해 ㈜효성으로 출범시켰다.
동시에 이 사장에게 ㈜효성의 자금 업무를 맡겼다.
이는 회사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에도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자금 업무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문성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의욕이 생겼습니다. 은행을 방문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은행을 나오는 것으로 하루 해가 졌습니다."
자금 담당은 불과 두달짜리였다.
하지만 그는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유동성 위기가 해소되자 99년1월 전무로 승진해 회장 비서실장이 됐다.
산만하게 펼쳐져 있는 사업을 정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는 어느새 사내 업무에 통달하게 됐다.
회의를 열면 시간 단위로 다른 얘기를 해야할 정도로 취급 품목이 많았지만 현미경적인 관리를 통해 탄탄한 사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제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업에 남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함께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순수 고전파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인용한다면 이 사장은 유학과 기업의 두갈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고 그 길에서 성공의 샘물을 길어올렸다.
먼 훗날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연민과 후회가 남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프로스트는 하나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슬프게 읖조렸지만 이 사장은 갈라진 길과 길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으로 믿고 있다.
만약 오늘 당장 그가 대학강단에 선다면 어떨까.
박사학위가 없다고, 유학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자격미달이라고 할까.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젊은 시절 그는 커다란 이민백에 샘플들을 쑤셔넣고 겁없이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효성의 새파란 신입사원에게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집에까지 찾아왔던 얘기는 지금도 섬유업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섬유수출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며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라선 그이지만 당초의 꿈은 기업인이 아니라 대학교수였다.
경기고(66회ㆍ70년 졸업)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이 사장은 전형적인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고(故) 이종우 전 고려대 총장이 할아버지다.
부친 이동수씨(81)는 현재 동아꿈나무 재단 이사장이고 별세하신 모친 박화서씨도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 사장 자신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강단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75년8월 경기도 동두천의 한 군부대에서 현역복무를 마친 뒤 본격적인 유학 준비에 들어갔다.
76년11월 효성물산에 입사한 것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잠깐 사회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
우연찮게 학교에 들러 효성물산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그해 9월 말 교수 추천을 통해 입사하게 된 것.
"처음엔 효성물산이 종합상사인 줄도, 나일론이라는 제품을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저 전공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처음 맡은 일은 직물(원사)수출.
연구소를 지망했지만 회사는 그를 영업부에 배치했다.
화섬 면방 면직물을 취급하며 신용장 개설과 같은 무역실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영업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신의 실적을 쳐다보며 신기해 하기도 했다.
"제가 영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어요."
처음엔 텔렉스나 편지를 통해 영업을 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아예 출장을 나갔다.
주로 중동지역이다.
그는 쿠웨이트의 '알부자'들이 모여 있는 포목상들을 집중 공략했다.
영업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무더운 낮에는 포목점들이 영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업은 선이 굵은 스타일이었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이었다.
현지 시장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이 사장의 물건을 받아 돈을 번 상인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현지 신뢰도 높아지자 효성물산의 '주가'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는 여전히 신입사원이었지만 중소기업 사장들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기다려 서로 샘플을 보여주려고 아우성이었다.
젊은 나이에 우쭐한 기분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 유학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영업하는 재미에 빠져 차일피일 유학을 미루다보니 어느새 3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섬유공학보다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결국 79년 여름에 사표를 냈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원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자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영업담당 임원은 이 사장을 붙들기 위해 호주 시드니의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평사원에겐 특별한 혜택이었다.
유학을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그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참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면 기업과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회사에 남자니 어릴적 꿈을 포기해야 하고…."
하지만 비즈니스는 현실에 있었고 학자의 길은 막연하고 먼 미래였다.
어려운 영업을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한 기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삼성전자를 다니고 있던 친형 이상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54)도 효성 잔류를 권유했다.
그는 시드니행을 결정했다.
되돌리기 어려운 인생 최대의 승부처였다.
4년간의 시드니 생활을 마치고 83년 귀국했다.
직물수출 과장이라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로는 효성물산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 사장은 목표를 세웠다.
당시 연간 3천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 규모를 5년내 1억달러로 늘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선 수출대행 비중을 대폭 낮춰 직수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이나 홍콩에 현지 딜러를 두고 효성 브랜드로 직접 영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할 경우 폴리에스터 직물 쿼터와 나일론 직물 쿼터도 과감하게 사들였다.
이 사장은 당초 목표보다 2년 앞당긴 86년에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88년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1인 지점장으로 나갔다.
이미 다른 종합상사들이 진출해 있었지만 이 사장은 그 곳에서도 항상 1등이었다.
가족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나갔던 그는 효성외의 다른 기업들 제품까지 갖다파는 왕성한 영업력으로 1년에 3천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91년 귀국해 봉제무역부장을 거친 뒤 93년 영업 출신으론 처음으로 기획부장이 됐다.
"당시 기획부장은 관리 출신들로 계속 채워졌으나 현장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가 맡게 됐습니다. 영업을 떠나 회사 전반의 경영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지요."
94년 임원이 된 후에 기획실-시장개척실-사업개발실 등을 복수로 맡으며 나름대로 경영감각을 익혀나갔다.
종합상사는 점점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확장일로의 영업은 방대한 해외네트워크를 남겼지만 수익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97년 IMF 사태가 터지자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각됐다.
효성그룹은 98년 효성T&C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물산 등의 4개사를 통합해 ㈜효성으로 출범시켰다.
동시에 이 사장에게 ㈜효성의 자금 업무를 맡겼다.
이는 회사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에도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자금 업무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문성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의욕이 생겼습니다. 은행을 방문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은행을 나오는 것으로 하루 해가 졌습니다."
자금 담당은 불과 두달짜리였다.
하지만 그는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유동성 위기가 해소되자 99년1월 전무로 승진해 회장 비서실장이 됐다.
산만하게 펼쳐져 있는 사업을 정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는 어느새 사내 업무에 통달하게 됐다.
회의를 열면 시간 단위로 다른 얘기를 해야할 정도로 취급 품목이 많았지만 현미경적인 관리를 통해 탄탄한 사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제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업에 남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함께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순수 고전파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인용한다면 이 사장은 유학과 기업의 두갈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고 그 길에서 성공의 샘물을 길어올렸다.
먼 훗날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연민과 후회가 남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프로스트는 하나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슬프게 읖조렸지만 이 사장은 갈라진 길과 길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으로 믿고 있다.
만약 오늘 당장 그가 대학강단에 선다면 어떨까.
박사학위가 없다고, 유학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자격미달이라고 할까.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