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3) 김신배 SK텔레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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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앞날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불안이야말로 미래의 본질이다.
사실,우리가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래는 변화무쌍한 에너지의 흐름이고 불안은 늘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제비는 겨울하늘을 날지 못하고 민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지 못한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에겐 불안이 없다.
동시에 미래도 없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는 도태되고 불안과 실존을 견디며 나아가는 자는 승리할 기회를 갖게 된다.
김신배(金信培-50) SK텔레콤 사장은 일생을 통해 두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나는 집을 팔아 유학을 떠났던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세"가 보장된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좋은 머리로 일류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에 안착했지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을 계속 채찍질했다.
김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왔다.
78년1월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들어갔지만 실제 근무는 파견 형식을 빌려 삼성물산에서 했다.
그는 해외 수출기획과 곡물수입 등의 업무를 배우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결혼도 했다.
대학동창인 윤창번 하나로텔레콤 사장(50)으로부터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여동생 소영씨(48)를 소개받아 3년을 교제한 뒤였다.
83년 여름,그는 갑자기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집안에서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와튼스쿨을 다니며 돈벌이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갖고 있던 조그마한 아파트를 팔고 돈이 될만한 물건들도 처분해 무작정 떠났다.
사실상 전 재산을 털어 떠난 유학길이었다.
모두 5만달러의 학비를 들여 2년만에 MBA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무슨 원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를 몇년 다니다보니 '내가 기업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생깁디다. 실력이 달리고 경제와 경영의 흐름을 읽는 시야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5년 미국에서 돌아와 삼성전자 해외사업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물산 근무시절 상사로 모셨던 주영만 당시 삼성전자 뉴욕 지사장이 추천해주었다.
영국공장 건립 프로젝트를 맡아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입지 선정부터 현지 정부와의 교섭 및 라인 구축 업무를 일괄적으로 추진했다.
당당하고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시절이었다.
88년엔 회사의 골치아픈 송사도 해결했다.
삼성전자는 10년 전인 78년 미국에 수출한 흑백TV 한대가 보스턴의 한 가정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소비자로부터 무려 1천6백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받은 것.제조회사의 책임 여부를 놓고 10년째 송사를 벌여왔지만 브랜드 이미지만 나빠질 뿐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 사장은 스스로 이 일을 맡아 몇차례 미국측 변호사와 접촉한 끝에 2백만달러를 물어주기로 최종 합의했다.
"회사에서 누군가 해야할 일이었지만 나중에 책임문제가 생길까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더군요. 처음엔 변호사도 아닌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지만 의외로 일이 잘 풀렸습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89년 VCR 수출팀장으로 올라섰고 90년(부장)엔 삼성맨들이 선망하는 그룹 비서실에 입성했다.
삼성의 해외투자와 글로벌 인재육성 전반의 업무를 맡았던 그는 삼성의 해외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임원 승진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비서실 생활이 1년 반쯤 지나자 왠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서류를 들고 찾아오는 계열사의 머리 희끗한 임원들을 보면서 '몇년이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습니다. 한치의 여유도 없이 꽉 짜여진 업무에도 조금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 사장은 무선호출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중견 건설회사 대호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게 됐다.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맡아 통신사업을 총괄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비서실의 황영기 이사(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가 극구 말렸지만 이미 통신사업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를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대호는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탈락해 버렸다.
여러 모로 억울한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백지상태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업무를 챙겨가며 입찰에 매달렸던 김 사장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건설업을 하자고 삼성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다음 귀착지는 동양그룹이었다.
동양은 지분을 갖고 있던 데이콤을 발판으로 통신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고 했기 때문에 김 사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양 역시 통신사업을 밀어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자 여력이 부족했고 조직의 경험도 일천했다.
94년 해외합작 SI(시스템 통합)회사인 '동양시스템 하우스'에서 경영지원본부장으로 SI 분야의 경험을 쌓는데 만족해야 했다.
김 사장이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으로 옮긴 것은 95년7월.한국이동통신은 94년7월 SK에 인수돼 민영화 1년을 맞이하고 있던 터에 사업전략 담당 이사로 김 사장을 영입했다.
마침내 날개를 달았다.
김 사장은 맹렬한 기세로 통신시장 장악에 나섰던 SK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잡았다.
98년에 국제 전화사업자인 SK텔링크 사업을 주도한데 이어 단말기 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SK텔레텍도 설립했다.
99년엔 수도권 지사장을 맡아 고객 1천만명 돌파의 선봉장을 맡았다.
무선통신 분야 뿐만 아니라 유선통신 방송 금융 분야의 융·복합화 전략도 마련했다.
김 사장은 대호와 동양에서 보냈던 4년의 세월을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말했다.
열정과 의지는 있었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소줏잔도 많이 비웠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업무 폭도 넓혀 생산현장을 관리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섭렵했다.
한국이동통신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나름대로 통달하게 된 통신과 SI 지식은 나중에 CEO로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순리라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김 사장은 고도성장이 끝나가는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게 돼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보냈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던 때와 비교해 '불행하다'는 표현까지 했다.
하지만 인생역전과 같은 허황된 꿈만 가지지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몸을 빼 새로운 일에 과감하게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어차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다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저만 하더라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세칭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나 노력하면 이 정도의 성취는 이룰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 김 사장이 젊은이들에게 던진 화두는 '안주할 것이냐,아니면 도전할 것이냐'였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불안이야말로 미래의 본질이다.
사실,우리가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래는 변화무쌍한 에너지의 흐름이고 불안은 늘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제비는 겨울하늘을 날지 못하고 민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지 못한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에겐 불안이 없다.
동시에 미래도 없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는 도태되고 불안과 실존을 견디며 나아가는 자는 승리할 기회를 갖게 된다.
김신배(金信培-50) SK텔레콤 사장은 일생을 통해 두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나는 집을 팔아 유학을 떠났던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세"가 보장된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좋은 머리로 일류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에 안착했지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을 계속 채찍질했다.
김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왔다.
78년1월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들어갔지만 실제 근무는 파견 형식을 빌려 삼성물산에서 했다.
그는 해외 수출기획과 곡물수입 등의 업무를 배우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결혼도 했다.
대학동창인 윤창번 하나로텔레콤 사장(50)으로부터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여동생 소영씨(48)를 소개받아 3년을 교제한 뒤였다.
83년 여름,그는 갑자기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집안에서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와튼스쿨을 다니며 돈벌이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갖고 있던 조그마한 아파트를 팔고 돈이 될만한 물건들도 처분해 무작정 떠났다.
사실상 전 재산을 털어 떠난 유학길이었다.
모두 5만달러의 학비를 들여 2년만에 MBA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무슨 원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를 몇년 다니다보니 '내가 기업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생깁디다. 실력이 달리고 경제와 경영의 흐름을 읽는 시야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5년 미국에서 돌아와 삼성전자 해외사업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물산 근무시절 상사로 모셨던 주영만 당시 삼성전자 뉴욕 지사장이 추천해주었다.
영국공장 건립 프로젝트를 맡아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입지 선정부터 현지 정부와의 교섭 및 라인 구축 업무를 일괄적으로 추진했다.
당당하고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시절이었다.
88년엔 회사의 골치아픈 송사도 해결했다.
삼성전자는 10년 전인 78년 미국에 수출한 흑백TV 한대가 보스턴의 한 가정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소비자로부터 무려 1천6백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요구받은 것.제조회사의 책임 여부를 놓고 10년째 송사를 벌여왔지만 브랜드 이미지만 나빠질 뿐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 사장은 스스로 이 일을 맡아 몇차례 미국측 변호사와 접촉한 끝에 2백만달러를 물어주기로 최종 합의했다.
"회사에서 누군가 해야할 일이었지만 나중에 책임문제가 생길까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더군요. 처음엔 변호사도 아닌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지만 의외로 일이 잘 풀렸습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89년 VCR 수출팀장으로 올라섰고 90년(부장)엔 삼성맨들이 선망하는 그룹 비서실에 입성했다.
삼성의 해외투자와 글로벌 인재육성 전반의 업무를 맡았던 그는 삼성의 해외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임원 승진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비서실 생활이 1년 반쯤 지나자 왠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서류를 들고 찾아오는 계열사의 머리 희끗한 임원들을 보면서 '몇년이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습니다. 한치의 여유도 없이 꽉 짜여진 업무에도 조금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 사장은 무선호출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중견 건설회사 대호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게 됐다.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맡아 통신사업을 총괄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비서실의 황영기 이사(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가 극구 말렸지만 이미 통신사업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를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대호는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탈락해 버렸다.
여러 모로 억울한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백지상태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업무를 챙겨가며 입찰에 매달렸던 김 사장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건설업을 하자고 삼성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다음 귀착지는 동양그룹이었다.
동양은 지분을 갖고 있던 데이콤을 발판으로 통신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고 했기 때문에 김 사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양 역시 통신사업을 밀어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자 여력이 부족했고 조직의 경험도 일천했다.
94년 해외합작 SI(시스템 통합)회사인 '동양시스템 하우스'에서 경영지원본부장으로 SI 분야의 경험을 쌓는데 만족해야 했다.
김 사장이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으로 옮긴 것은 95년7월.한국이동통신은 94년7월 SK에 인수돼 민영화 1년을 맞이하고 있던 터에 사업전략 담당 이사로 김 사장을 영입했다.
마침내 날개를 달았다.
김 사장은 맹렬한 기세로 통신시장 장악에 나섰던 SK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잡았다.
98년에 국제 전화사업자인 SK텔링크 사업을 주도한데 이어 단말기 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SK텔레텍도 설립했다.
99년엔 수도권 지사장을 맡아 고객 1천만명 돌파의 선봉장을 맡았다.
무선통신 분야 뿐만 아니라 유선통신 방송 금융 분야의 융·복합화 전략도 마련했다.
김 사장은 대호와 동양에서 보냈던 4년의 세월을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말했다.
열정과 의지는 있었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소줏잔도 많이 비웠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업무 폭도 넓혀 생산현장을 관리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섭렵했다.
한국이동통신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나름대로 통달하게 된 통신과 SI 지식은 나중에 CEO로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순리라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김 사장은 고도성장이 끝나가는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게 돼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보냈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던 때와 비교해 '불행하다'는 표현까지 했다.
하지만 인생역전과 같은 허황된 꿈만 가지지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몸을 빼 새로운 일에 과감하게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어차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다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저만 하더라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세칭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나 노력하면 이 정도의 성취는 이룰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 김 사장이 젊은이들에게 던진 화두는 '안주할 것이냐,아니면 도전할 것이냐'였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