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 없음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한 사람은 안드레이 그로미코다.

옛 소련의 노련한 외무장관이었던 그는 "그래서 외교관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김선일씨에서부터 고구려사에 이르는 일련의 문제들로 다리품을 판 외교부를 규탄하자는 것이냐고? 아니다.

이 같은 직업 본능이 외교관들의 동업자적 세계관에서만 횡행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모든 직업 관료들의 필연적 행동 패턴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허다한 행정 규제가 사실은 관료들의 행정 편의주의를 위해 존재할 가능성은 분명 50%를 넘기는 확률 분포 구간에 속한다 할 것이다.

수도 없이 국회에 제출되는 법안 가운데는 관료집단의 조직 이기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된 것들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추진되고 있는 한국투자공사도 국가의 목표라기보다는 관료들의 행정 편의에 봉사하는 조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고,말썽 많은 공정위의 계좌추적권이나 출자총액 규제 같은 법안들도 기실은 공무원들의 조직보호 논리에서 동력을 얻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와 관료를 혼동할 이유는 없다.

논란 중인 사모펀드 관련 법안도 '국가사무'라기보다는 행정편의용 '관료사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놀랍게도 국회에서 "사모펀드는 특성상 고도의 전문성과 자기책임성이 요구되므로 은행들이 책임있는 역할을 해서 반듯한 형태의 사모펀드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까만 백조'라는 말만큼이나 엉터리다.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위원장이 비판자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비정하거나 아니면 둘 모두"라고 비난했던 어법을 잠시 빌려온다면 이 부총리의 이 말은 '본인이 무지하거나 국회의원들을 무지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둘 모두'에 해당한다.

아무리 논리가 뒤집어진 시대라 하더라도 '대강 꼼꼼히'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듯이 '고도의 자기 책임성'과 '은행'이라는 단어가 조합을 이룰 수는 없다.

자기책임이라는 말은 신용창출의 공공성을 담보하는 은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철저하게 스스로 책임지는 헤지펀드에 더욱 어울리는 말이다.

반듯한 사모펀드라는 말도 곤란하다.

사모펀드는 반듯하다기보다는 지극히 비정형적인 움직임을 행동 특성으로 하고 있다.

항차 은행을 증권사도,투자신탁도 뛰어넘어 사모펀드에까지 밀어넣겠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도 거꾸로 된 논리다.

더구나 정부가 직접 모금함을 돌린다면 이는 사모도 공모도 아닌 '관모(官募)펀드'라고 불러 마땅하다.

이헌재 부총리가 이를 몰랐을까? 물론 아니다.

'우리금융'마저 외국자본에 넘기지 않으려다 보니 사모펀드라는 편법이 필요하게 됐고 달리 돈을 낼 곳이 없으니 은행과 연기금이라도 동원하겠다는 일견 우국충정의 결과다.

충정이라면 무조건 옳다? 물론 그것도 아니다.

시중은행을 모두 외국자본에 팔아넘긴 그간의 정책이 잘못됐던 것이고,자본시장과 금융자본이 괴멸된 작금의 상황을 사모펀드라는 편법으로 덮어버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순이 있다면 그 모순을 시인하는 기반 위에서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에 와서 '까만 백조'를 주장하며 더듬수를 놓는다고 외통수로 몰린 금융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본질은 덮어놓은 채 외형상 문제가 해소된 것처럼 만들기로 든다면 관료사무는 성공이지만 국가사무는 더욱 관치금융으로 치닫게 된다.

< 정규재 편집부국장 jkj@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