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중반 인텔 사장인 앤디 그로브는 D램 메모리 공장을 방문해 앞으로 생산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끝없이 추락하는 칩 가격,자동으로 따라오는 막대한 손실.

사업 포기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짧은 결정 배후엔 긴 산고(産苦)가 숨어 있었다.

메모리 칩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최초의 시장 개척,한때 1백% 가까운 점유율',이대로 접기에는 너무 아쉬운 기록들 아닌가.

'잔인한 한 해'가 절반쯤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이 사업을 버린다는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로의 전환,그 전면에 그로브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이 분야 매출액이 메모리 칩 역대 최고 실적을 뛰어 넘은 것이다.

'의사결정의 순간'(피터 드러커 외 지음,심영우 옮김,21세기북스)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세계 석학들의 논문 8개를 모은 신간.

최고경영자의 의사결정 원칙과 당장 실전에 써먹을 만한 검증된 모델들이 소개돼 있다.

복잡한 대안들을 우선 순위에 따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맞교환 법,40여개국서 1백만명 이상이 활용하고 있는 케프너 트리거 기법 외에 '육감에 의한' 의사결정 과정도 눈길을 끈다.

J&J(존슨 앤 존슨) 회장 랄프 라슨의 "본능적인 신호를 무시했을 때 항상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는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반대하는 5만달러짜리 자동차 닷지 바이퍼를 만들어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킨 보브 루츠,가입자 사용료에 기반을 둔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서 벗어나 광고와 전자상거래에 집중해 수십억 달러 수익을 낸 AOL 피트먼 사장의 판단도 '감(感)'에 힘입은 바 크다.

냉철한 분석을 참고하든 직관에 의존하든 간에 결단의 순간은 고독하다.

드러커의 충고처럼 '독단에 빠지는' 위험한 의사결정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리더라면 친구로 삼을 만한 책이다.

2백24쪽,1만2천원.

김홍조 편집위원 kiru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