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택 회장은 심적 고통이 가장 컸던 기간으로 신사업본부장 시절(88년 2월~91년 11월)을 꼽았다.

당시 박태준 포철 회장은 92년 광양제철소 준공을 앞두고 연간 1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신사업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포스코라 해도 1조원짜리 신사업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다 박 회장은 수시로 일거리를 던져주는 스타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일본 잡지를 북 찢어주며 검토해보라는 식이었다.

당시 이 회장은 온갖 사업을 다 훑어보았다.

철강을 직접 소비하는 자동차 사업 진출을 위해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과 은밀히 합작협상을 벌인 적도 있다.

심지어는 철강과 전혀 관련이 없는 동물 사료사업까지 신규사업 후보에 올려놓았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한 돼지농장에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회장의 인사기록 카드를 보면 이 기간중 총 23차례에 걸쳐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돼있다.

하지만 이렇다할 만한 소득은 없었다.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건의해 신세기통신을 설립(92년)한 것을 빼고는 대부분 보류되거나 폐기됐다.

때문에 이 회장은 사내 박 회장의 '재실'을 알리는 1번 불이 켜져 있으면 늘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는 이 기간에 웬만한 비즈니스는 모조리 공부할 수 있었다.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도 한눈에 꿰뚫을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같은 경험이 CEO로서 균형감각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