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이는 유가] 되돌아본 '오일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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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세계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 오일쇼크는 지난 70년대 두차례 발생했다.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불거졌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마감됐다.
이후 아랍 산유국들은 이슬람교도 입장에서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 석유공급을 제한 또는 금지하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나아가 그해 11월4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생산량을 25%나 감산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73년 중 배럴당 2.5달러 선에서 유지되던 국제 유가가 이듬해 초에는 4.7배인 배럴당 11.7달러까지 치솟았다.
아랍 산유국들은 소비국을 우호국과 비(非)우호국으로 나눠 우호국에는 감산에도 불구하고 종전대로 석유를 공급했다.
당시 한국은 비우호국으로 분류됐다.
때문에 한국에 원유를 공급하던 걸프 칼텍스 유니언 등 3개 석유메이저는 공급량을 감축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급속한 공업화로 원유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데다 73년부터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을 시작한 한국에서 원유공급 차질은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석유 메이저들과 끈질긴 협상을 통해 원유 공급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선 1차 오일쇼크의 영향을 덜 받았다.
특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오일달러를 겨냥,중동건설 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오일쇼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2차 오일쇼크는 78년12월 OPEC의 기습적인 유가인상 결정으로 시작됐다.
이란이 국내 정치(이슬람 혁명)·경제적 혼란을 이유로 원유생산량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 것도 한 요인이 됐다.
1차 석유파동 때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었던 유가는 불과 6년사이 20달러선을 돌파했으며,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았다.
한국은 1차 쇼크 때보다 훨씬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으로 원유에 대한 더욱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지기 직전인 77∼79년 평균 8.7%이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오일쇼크 직후인 80∼82년에는 3.9%까지 추락했다.
특히 80년에는 정치불안으로 인한 소비 침체와 맞물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2.1%로 급전직하했다.
80년대 초 3년간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38.9%나 급등했으며 무역수지 적자폭도 연평균 40억2천만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현재 한국 경제는 유가가 일정 수준까지 높아지더라도 과거 2차 오일쇼크 때보다는 충격이 덜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2차 오일쇼크 당시 62.8%에 달했던 석유의존도가 이후 꾸준히 하락해 작년에는 47.6%까지 떨어졌고,전체 산업에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업종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또 정부와 민간에서 유사시에 대비해 약 1백일간 쓸 수 있는 원유를 비축하고 있는 점도 과거 오일쇼크 때와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고유가 구조가 고착화된다면 경제 고비용을 가중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회복을 더욱 더디게 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