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6)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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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립(鄭聖立-54)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천성이 느긋하다.
지각을 할지언정 절대로 뛰지않는 스타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집(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도보로 불과 10분 거리밖에 되지않는 곳에 학교(경기고)가 있었지만,그는 제시간에 정문을 통과한 기억이 별로 없다.
정 사장의 느긋한 천성은 전세방 조차 마련해놓지 않고 덜렁 결혼식부터 치른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76년10월 결혼했다.
헌데 신혼여행을 갖다와보니 살집이 없더라는 것.뒤늦게 전세방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수 밖에 없었으며 그 일로 인해 부인에게 평생의 "책"을 잡혔다고 한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탤런트 한진희 씨는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끄떡하지 않을 친구"라며 "지나치게 배짱이 좋아 직장생활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사장이 됐다고 해서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만디"라고 인생의 부침까지 피할 수는 없는 일.
1980년12월30일 함박눈이 쏟아지던 독일 함부르크.동해조선 정성립 과장이 묵고 있던 호텔에 본사로부터 텔렉스 한장이 날아들었다.
"채권단이 동해조선을 대한조선공사에 합병키로 결정했으니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즉각 귀국하라." 볼튼이라는 독일 선사와 수주협상을 마무리짓고 최종 사인을 남겨놓고 있던 상황에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동해조선은 과다 차입의 덫에 걸려 은행관리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대한조선공사(훗날 한진중공업에 합병)와의 합병은 사실상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말 큰일 났다 싶더군요.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졌던 제가 그 날만은 한숨도 못자고 꼬박 샜습니다."
정 사장의 첫 직장은 산업은행이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은행을 다니게 된 계기는 실로 우연이었다.
74년 가을 육군사관학교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학교에 들렀다가 산업은행 추천서를 받아든 것.부서는 조선업체에 대한 여신을 관리하는 조선반 기술부.나중에 현대중공업 사장을 지낸 조충휘씨(61)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은행원은 길이 아니었다.
체칠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77년 방향을 틀었다.
규모는 작지만 한창 기세를 돋우던 동해조선으로 옮겨 해외영업을 맡았다.
"경기고에 서울대까지 나온 사람이 왜 하필이면 중소기업이냐고 여기저기서 수군댔지만 난 정말 즐거웠어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으니까요."
그랬던 동해조선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정 사장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81년 봄 대우조선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학창 시절 알았던 선배가 당시 대우조선 연영소 영업부장에게 그를 추천한 것.두말 없이 출근했다.
들어가자마자 일을 냈다.
동해조선 시절 친분을 쌓았던 인도 에사르(Essar)사로부터 척당 8백만달러짜리 '오프쇼어 지원선' 선박을 한꺼번에 6척이나 수주한 것.당시로서는 큰 물량이었다.
82년8월 대우조선은 그를 말레이시아 1인 지사장으로 내보냈다.
연 평균기온 32도를 오르내리는 콸라룸푸르에서 에어컨도 없이 지냈다.
2년 남짓 머무르면서 벌크 운송사인 PNSL로부터 두 건의 대형 플랜트 사업을 수주해 '밥값'을 했다.
다음 귀착지는 싱가포르,이어 85년엔 런던이었다.
86년 선박 영업1부장이 돼 귀국했지만 그것도 잠시,89년에 노르웨이 오슬로 지사장으로 발령나 다시 해외로 나가야 했다.
당시 조선사들의 최대 승부처는 초대형 유조선인 VLCC(초대형 유조선). ICB 아르고노트 프론트라인 등 세계 굴지의 유조선 선사들이 북유럽에 포진하고 있었다.
정 사장은 정공법을 썼다.
선주들을 직접 공략하고 나선 것.여름이 되면 선주들의 휴양지인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으로 출장을 갔다.
아쉬울 것 없는 선주들이 휴가를 방해하는 생면부지의 불청객을 반길 리가 없었다.
예의가 없다며 아예 그 자리에서 돌려세우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접촉하고 또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다.
힘들 때마다 군대 시절 겪었던 치욕을 생각했다.
그는 육사 행정병으로 근무하기 전에 대전에 있던 육국 통신학교에서 8주짜리 교육을 받았다.
당시 1주일 먼저 입대했던 '고참'이 청소 불량을 이유로 자신의 운동화 바닥을 핥을 것을 강요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시키는대로 다 했다.
사람 좋고 비위 좋았던 정 사장이었지만 그 일만은 평생을 잊지 못하고 있다.
90년대초 대우조선은 북유럽에서 발주된 VLCC를 싹쓸이했다.
한꺼번에 여러 척을 수주하다 보니 풍부한 건조 경험이 쌓이고 이는 다시 새로운 수주로 이어졌다.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을 가고 한때 쌓아둔 자산은 인생을 뒤흔든다.
당시 거래를 텄던 북유럽 선사들은 훗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대우조선에 LNG(액화천연가스)선을 대량 발주해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조직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공(功)은 쉽게 잊혀지고 과(過)는 오랫동안 기억된다.
93년 이후 그는 오슬로에서 죽을 쒔다.
하필이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세계 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렸던 그 시절에 이상하게도 실적을 내지 못했다.
95년 이사부장 신분으로 6년만에 귀국했을 때 그는 마땅히 갈 자리가 없었다.
그는 섬과 같은 존재였다.
공채 출신도 아니고 15년을 근무했다고는 하지만 본사 근무는 고작 3년에 불과했다.
95년 8월,회사는 그를 인력담당 이사로 발령냈다.
노무관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대우조선에서 노무관리는 말 그대로 '죽음'의 보직이었다.
더군다나 동해조선 시절부터 영업만 해온 그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사였다.
"참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직위가 이사라고 부하들이 따릅니까? 거제도 옥포에 낙하산처럼 떨어진 저를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함부르크 이후 두번째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선잠이 들었다가 불현듯 깨어나면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잠도 오지 않는 밤에는 조선소 도크에 올라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어느날 문득 저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직도 동료도 아닌,저의 나약한 의지가 모든 고통의 원천이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은 정 사장에게 꼭 들어맞는다.
그는 노사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편법을 쓰거나 임기응변식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조급증을 내지도 않았다.
정 사장은 96년 단체협상을 하면서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 노조에 작업중지권을 부여했다.
안전시설 미비시 노조가 작업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한 이 조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우조선 노조가 이 단협조항을 한번도 악용한 적이 없다.
정 사장은 늘 골칫거리였던 노사관계를 확실하게 안정시켰다.
98년 관리본부장(전무)으로 승진하고 2000년엔 지원본부장이 됐다.
정 사장이 마지막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은 대표이사 사장 통보를 받았던 2001년 7월27일.
"동해조선이 무너졌을 때는 젊음과 다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우가 붕괴될 때는 제가 회사의 2인자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진작 책임을 졌어야 할 제가 CEO가 됐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겠습니까."
정 사장은 느긋했지만 게으르지는 않았다.
쉽게 관행을 답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사내를 통틀어 자타가 공인하는 컴퓨터 1인자다.
그는 또 어려움에 봉착해 인간적으로 흔들리면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았다.
무심하게 내리던 함부르크의 눈도,메아리조차 남지 않던 옥포 조선소의 절규도 다 지난 일.문득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본 뒤 스스로 훌훌 털고 일어섰다.
사실,굳이 정사장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열쇠는 이 간단한 성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